‘지구 멸망의 날’에 온 편지…젊은 연극인이 바라본 ‘기후위기’ [고승희의 리와인드]
‘기후위기와 예술’ 주제의 작품
2023년부터 ‘지구 멸망의 날’까지
기후재난, 불평등, 종 차별은 물론
극장의 존재와 가치까지 담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43년, 지구의 ‘마지막 인류’에게서 편지가 왔다. 두려움과 슬픔, 수십년간 이어온 경고를 무시한 자기반성이 뒤섞였다. 이제는 더이상 의미 없는 ‘분노’도 미련처럼 비집고 나온다.
“우리를 헤어지게 만든 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에요.”
“모든 생명이 차별이 없는 곳에서 태어나게 해주세요.”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해요.”
“지구 종말 대피소도 없애주세요.”
연극 ‘당신에게 닿는 길’(10월 29일까지·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은 2023년에서 시작해 2043년 ‘인류의 마지막 날’을 담아낸 ‘재난 연극’이다. 주제는 ‘기후위기’. 지난해 국립극단 ‘창작공감:연출’로 선정, ‘기후위기와 예술’을 주제로 1년여의 시간에 걸쳐 개발한 작품이다. 2023 오늘의 극작가상을 받은 한민규가 극장, 연출을 맡았다.
좁고 긴 무대의 양옆으로 소수의 관객들이 마주 앉으면,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는 소리, 동물들의 괴로운 울음 소리로 연극은 시작한다. 105분의 짧은 연극은 시작부터 ‘본론’을 제시한다. 이 작품이 무엇을 주제로 했는지, 사전 정보가 없어도 연극은 5분 이내에 작품이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
“코로나는 어떤 병이었어요?”
소녀와 기후위기를 연구하는 과학자의 문답은 일종의 ‘서막’이었다. 2020년 이후 전 세계에 닥친 감염병의 원인을 기후 변화에서 찾는 것으로 연극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녀의 등장은 첫 장면 뿐이었으나, 지구에서 오래도록 살아갈 ‘미래 세대’의 불안이라는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극의 등장인물이 다양하다. 무대는 ‘기후 위기’ 작품을 쓰는 작가를 중심으로 모인 다양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105분 무대의 1막 격에 해당하는 2023년의 풍경은 이 작품을 1년여간 개발해온 한민규 연출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 이야기’처럼 보인다. ‘기후위기’ 연극을 준비하면서도, 정작 기후위기에 대한 고민 없이 ‘소재’로만 접근했던 시간을 반성하며, 기후위기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다. 기후위기로 터전을 잃은 ‘이안’이라는 소녀와 통신으로 만나고 이안을 살리기 위해 과학자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 과정에서 ‘기후 당사자’가 된 삼촌의 삶을 떠올린다.
그럼에도 지구의 위기를 감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 당장 경험하지 않은 위기는 먼 미래의 일로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정보와 지식을 채워 넣어도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는 무관심에 머문다. 연극 속 작가는 ‘기후 위기’ 연극을 올리기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만든 작은 극장이 여름 폭우로 물에 잠긴 후에야, 기후 시계가 멈출 날이 가까워진다는 것을 감각한다. 전반부에 해당하는 여기까지의 이야기가 연극 속 작가가 쓴 ‘극장전’의 일부라는 것이 한 연출가의 설명이기도 하다. ‘티핑포인트’(tipping point, 갑자기 뒤집히는 점)의 붕괴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물난리였다는 것을 인지하며, 연극 속 시계는 ‘지구 멸망의 날’로 향해간다.
2043년, 80년 후에야 있어야 할 지구 온도 5℃ 상승이 20년 만에 찾아오자 모든 것은 폐허가 됐다. 연극 속 작가와 기후 재난 속에서 ‘난민’이 된 사람들이 모인다. 이들은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극장에서 꾸준히 연극을 올린다. 2막 격인 후반부에선 ‘극중극’ 형식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기후위기의 상황 속에서 ‘지속가능한 연극’을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과 더불어 멸망을 앞둔 지구에서 빚어지는 갈등과 기후재난은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기득권 세력이 ‘지구 종말 대피소’에서 안전을 보장받을 때, 종말 앞에서 살아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 안에선 인간 군상의 민낯이 드러난다.
흥미로운 장면들이 있다. 극장의 사람들은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며 ‘난민 수용’을 두고 잠시 갑론을박을 벌인다. 재난 앞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영화 ‘콘트리트 유토피아’가 다루는 주제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연극 무대를 올리는 배우들은 아수라장이 돼가는 극장을 바라보며 공포에 휩싸인다. 작은 공연장에서 공포와 두려움이 들어찬 배우들의 모습은 생생하게 그려진다. 이 연극에서 가장 실감나는 장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눈빛은 다시 ‘극중극’으로 돌아간다. 재난 앞에서 드러나는 혼란은 ‘극중극’이 시작되자 고요를 되찾는다. 연극의 본질은 위기 안에서의 공동체를 통합하는 도구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통해 연극은 ‘공존’의 의미를 강조한다. 수차례의 폭발이 이어지고 ‘멸망의 날’은 더 가까워 온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우리의 이야기를 남기자는 것으로 연극을 끝을 향한다.
이 연극의 가장 큰 장점은 쉽게 쓴 ‘기후위기’ 극이라는 점이다. 기후위기에 무관심했던 한 사람이 그것을 감각해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다, 허구의 세계로 돌아가 위기의 장면을 그리며 몰입도를 높인다. 일자형의 길고 작은 무대에서 멸망 전 지구의 모습은 소리와 영상으로 완성된다. 폭발하는 대지를 울리는 굉음과 진동, 번쩍이는 섬광이 무대를 극적으로 만든다.
연극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기후위기를 다루며 종(種) 차별, 기후 불평등, 예술과 극장의 존재 이유와 역할 등 다양한 이야기가 꺼내왔다. 기후재난이 불러온 사회적 문제와 그것들에 대한 인식 과정은 한 줄의 대사로 그쳤다. 이런 이유로 연극이 던진 수많은 논쟁거리를 관객이 온전히 곱씹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 보였다. 무수히 많은 대사들의 나열은 다소 설명적이고, 반복학습을 하는 듯했다. 대사는 단순하고 직관적이라, 도리어 직접적으로 전달됐다.
연극의 제목에서 말하는 ‘당신’은 지구를 뜻한다. “지구를 하나의 인격체로 부르기로 한” 연극 속 작가의 결심에서 태어났다. 마지막 대사는 멸망으로 폐허가 된 공간에 남겨졌다.
“당신이 운다. 상처 때문에. 어쩌면 당신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 때는 몰랐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당신이었음을. 이안에게 닿는 길은 당신에게 닿는 길이었음을.”
대한민국, 혹은 세계 어딘가에서 기후 재난을 겪는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것이 지금의 위기를 감각하는 것이라고 연극은 말한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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