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지붕 위에 두고 온 의자

한겨레 2023. 10. 2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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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지석철, ‘부재’, 2023, oil on canvas, 37×34㎝. 페이토 갤러리 ‘지석철 개인전: 예사롭지 않은 날’

이주은 | 미술사학자·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화가들은 얼굴을 자주 그린다. 얼굴은 그 사람을 대표하고 그가 누구인지 식별하게 하며 어떤 감정 상태인지 알 수 있는 부분으로, 몸의 다른 부위와는 구분된다. 그러나 내 존재를 알리는 자화상이 반드시 얼굴일 필요는 없다. 빈센트 반 고흐는 얼굴 대신 벗어놓은 낡은 구두 한 켤레를 그려놓기도 했다. 상점에 파는 구두와 달리, 내가 신던 구두에는 내 흔적이 깃들어 있다. 끈이 풀려 느슨해진 구두를 보면 그 주인이 고달픈 하루를 보냈고 지금은 휴식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내가 돌아다닌 길을 일일이 기억하고 발걸음의 속도와 무게까지 온전히 머금고 있는 신발은 나 자신과 다름없는 물건이다.

지석철(1953년생)의 그림에도 얼굴은 없다. 그는 나뭇가지를 잘라 허술하게 만든 빈 의자를 자신의 자화상처럼 여긴다. 희망에 부풀어 멀리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또 힘에 겨워 맥없이 바닥에 엎어지기도 하는 화가의 모습이 그림 속 의자에 중첩된다. 그가 앉아 있던 수겹의 시간은 물론, 체온까지도 그곳에 스며있는 것 같다.

주인을 서서 걷게 만드는 신발과 정반대로 의자는 누군가를 한자리에 머물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온종일 행군한 군인은 저녁에 군화를 벗으려 할 때 자기 다리의 일부를 떼어내는 기분이 든다고 들었다. 몸 쓰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신발이 그의 분신이라면, 앉아 일하는 사람에게는 의자가 그렇다. 마감일에 맞춰 완성본을 납품해야 하는 직업이라면 누구라도 의자가 내 몸에 붙은 것처럼 여겨지는 날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꼼짝하지 않은 채 앉아 있다가 일어나려고 할 때 몸이 의자 자세로 굳혀져 잘 펴지지도 않는 날 말이다.

서울시 중구 페이토갤러리에 전시된 지석철의 ‘부재’는 붉은 기와지붕 위에 올려진 빈 의자가 주인공이다. 빈 의자는 부재의 징표이기도 하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시라.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이 ‘저 자리 누구지?’하고 빈 의자를 가리키곤 했다. 빈자리는 결석했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누구의 의자라거나, 잠시 자리를 비웠다거나 내일이면 다시 와서 앉을 거라는 변명은 있을 수 있겠지만, 현재 그는 부재중이다.

부재의 개념은 본래 더 심오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려면 종이 위에 아무것도 그리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수의 세계에서는 0이 부재와 관련되어 있는데, 기원전 2세기 인도 철학자가 0의 개념을 소개했고, 8-9세기에 이르러 아랍인이 0을 산술에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인간은 다른 숫자에 비해 훨씬 오래 성숙한 사고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0을 발견하게 된다.

원시인류가 일찌감치 생활 속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던 1이나 2에 비하면, 0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실제의 형체로부터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나와 둘은 지금의 나와 나 아닌 너의 등장으로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수이다. 아이를 낳을 때 셋이라는 수를 새로 알게 됐을 테고, 손가락 덕분에 다섯까지는 쉽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처럼 뛰어난 수학자를 배출한 고대 그리스인도 0은 인식하지 못했다고 하고, 가보지 못한 천국과 지옥의 모습까지 상세히 묘사할 수 있었던 중세 유럽인마저도 0의 개념에는 생소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떠남이나 비움으로 부재를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부재란 원래부터 ‘없음’ 상태일 때는 결코 알 수 없다가, 곁에 있었던 무엇이 사라졌을 때 혹은 꽉 채워져 있던 것을 텅 비게 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상실감이나 덧없음의 심정일지도 모른다. 요컨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부재란 애초에 없음이 아니라, 한때 거기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음인 셈이다.

지석철은 부재를 설명하는 도구로 작은 의자를 그림에 끌어들였다. 허름하고 왜소한 의자는 어둠 속에 산더미처럼 방치되어 있기도 하고, 아슬아슬한 위치에 홀로 놓여있을 때도 있다. 처음부터 무의미한 존재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라, 알맹이가 빠져나가고 공허해져서 빈껍데기만 남은 열망을 빈 의자로 암시하려는 듯하다.

세상에는 가질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는 의자가 많다. 내 것일지라도 맘껏 내 자리를 누리지 못하고 공중에 붕 떠서 불안정하게 버티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너무 높이 혹은 멀리 있어서 정착하지 못한 의자가 있을 테고, 그것에 대해 미련을 버리는 순간도 온다. 한때는 내 마음이 거기 있었지만 이제는 그곳에 없다. 지붕 위에 두고 내려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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