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시어가 브리튼의 소리와 만나는 현장 즐기세요”
새달 14일 ‘일뤼미나시옹’ 내한 공연
공연 앞서 ‘음악과 인문학’ 강연도
“저는 관습을 따르는 편이고, 무엇보다 천재가 아니에요!”
프랑스 시인 랭보(1854~1891),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1913~1976)과 닮지 않았느냐고 묻자, 영국 태생 테너 이안 보스트리지(59)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최근 서면 인터뷰에서 “랭보의 삶은 무척 혼란했고, 브리튼은 진보적인 동성 결혼이란 가정 안에서 예술의 길을 추구했다”며 세상의 관습과 규범을 넘어서려 했던 두 사람과 자신은 다르다고 했다. 보스트리지는 다음 달 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랭보의 시에 브리튼이 곡을 붙인 ‘일뤼미나시옹’(Op.18)을 노래한다. 세종솔로이스츠가 주관하는 ‘힉 엣 눙크’(Hic et Nunc) 페스티벌 무대 가운데 하나다.
이채로운 이력의 성악가 보스트리지는 원래 학자였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철학(석사), 옥스퍼드대에서 역사(박사)를 공부했고, 옥스퍼드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당연히 정식 음악 교육도 받지 않았다. 스물아홉이던 1993년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1925~2012)를 만나면서 인생 항로가 크게 바뀐다. 목소리의 잠재력을 알아본 디스카우는 직접 레슨을 해주며 보스트리지를 성악가의 길로 이끈다. “그는 저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보트리지는 디스카우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시와 목소리의 매혹적 만남을 말할 때 이번에 공연할 ‘일뤼미나시옹’은 빠지지 않는다. ‘계시’ 또는 ‘영감’이란 뜻을 지닌 랭보의 산문 시집 ‘일뤼미나시옹’( Les Illuminations)에서 발췌한 9개 산문시에 브리튼이 격정적인 관현악을 입혔다. “이 곡은 환각적 이미지로 가득해요. 관능적이고 재미있으면서 어둡기도 하죠. 인간사를 거울처럼 온전히 담고 있어요.” 보스트리지는 “규모가 큰 편인데 슈베르트, 슈만 못지않게 세세한 부분에 주의를 기울여 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본래 소프라노를 위한 곡인데 요즘엔 테너가 더 자주 노래한다. “브리튼은 이 곡을 처음엔 소프라노를 위해 작곡했지만 결국 테너 피터 피어스(1910~1986)의 해석을 더 선호하게 됐어요.” 보스트리지는 “소프라노가 부른 뛰어난 음반들이 여럿 있지만, 이 작품의 거칠고 노골적인 성격이나 서커스 또는 카바레 같은 면은 낮은 목소리로 표현하기가 더 수월하다”고 했다. 브리튼은 9곡 가운데 1곡을 평생의 동성 연인인 피터 피어스에게 헌정했다. 보스트리지는 “이 작품의 성적 에너지 대부분이 브리튼과 피어스의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짚었다. 브리튼과 피어스는 나란히 안장됐다.
보스트리지는 2005년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멤버들과 ‘일뤼미나시옹’ 앨범을 발표했다. 당시 ‘한 편의 오페라’란 호평을 받았다. “그는 “예전보다 목소리가 더 어둡고 커졌는데 그런 점이 음악에도 변화를 줄 것 같다”며 “이 작품을 통해 브리튼이 창조한 소리의 세계가 랭보가 창조한 시어의 세계와 만나는 현장을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 관객에게 “가사를 읽어보고, 여러 연주자들의 버전을 비교해 감상하고 오면 좋을 것”이라고 권했다.
철학·역사 전공…29살에 성악의 길
가사 분위기 전달하는 표현력 탁월
2018년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
“한국인의 음악적 능력, 세계에 영향”
청아한 목소리, 창백한 얼굴, 지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보스트리지는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다. 2018년엔 서울시향이 ‘올해의 음악가’로 지정해 그에게 7차례 무대를 제공했다. 가사의 분위기를 실감 나게 전달하는 그의 빼어난 표현력도 인기 비결 가운데 하나다. “세계 어디에도 한국처럼 음악에 목말라하고 열광하는 젊은층으로 가득한 청중은 없어요.” 그는 “한국 음악가들은 오케스트라 단원이건, 독주자이건 무대가 원하는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며 “한국인들의 음악적 능력은 전 세계 음악 무대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슈만의 성악 작품을 녹음했고,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붙인 노래들, 본 윌리엄스의 실내악 작품의 녹음을 앞두고 있다.
올해로 6회를 맞는 클래식 페스티벌 ‘힉 엣 눙크’(Hic et Nunc)는 라틴어로 ‘여기 그리고 지금’이라는 뜻이다. 세종솔로이스츠가 주축이 되어 11월9일부터 22일까지 6개의 공연을 선보인다. 이안 보스트리지는 공연에 앞서 11월9일 ‘음악, 인문학으로의 초대’라는 주제로 강연도 펼친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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