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화장실에서 쉬라고 지시"…"우리 같은 사람, 쉴 곳 없어요"

조을선 기자 2023. 10. 29. 15: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업장 휴게시설 의무화됐지만…사각지대 방치된 산단 실태

"'화장실'을 휴게실로 쓰라고 지시…오폐수 냄새에 머리 아파"

'이것은 휴게실인가, 화장실인가, 청소도구함인가?' 어느 날 한 취재원으로부터 인천 부평 국가산업단지 내 휴게실이라며 건네받은 영상들을 보고 제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업장의 휴게실은 소변기가 설치된 어느 화장실이었습니다. 한켠에는 각종 고물과 쓰레기들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황당하게도 이 소변기 바로 옆에 의자가 놓여있고, 정수기가 있었습니다. 의자 아래엔 믹스커피 봉지도 보였습니다. 누군가 이곳에서 실제로 쉬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인천 부평 산단 노동자]
"화장실을 휴게실로 그냥 쓰라고 지시하면서 변기 같은 건 비닐로 감아두고, 안에다 의자 두고, 헹거 두고 이런 식으로 지금 쓰고 있어요."

[기자]
"실제로 거기서 쉬시는 거예요?"

[인천 부평 산단 노동자]
"앉아서 졸고 계시는 분들도 있고요, 간식이 나오면 거기서 드시는 분들도 계시고, 옷도 거기서 갈아입으시고요. 사실, 절대 사람이 쉴 수가 없는 곳이에요. 오폐수 냄새라든가, 암모니아 냄새가 정말 많이 나고. 그래서 안에 들어가기가 되게 힘들 정도예요. 그런 데를 휴게실이라고 하고 있으니까. 이제 다 머리 아프다고 하시고. 마땅한 휴식 공간이 당연히 없으니까 울며 겨자먹기로 그냥 이런 열악한 공간에서 쉬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에요."

또 다른 영상 속 휴게실은 말 그대로 청소도구함이었습니다. 벽에는 대걸레와 빗자루 등 청소도구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심지어 천장에는 시커먼 곰팡이가 슬어있었습니다. 취재원은 명확히 이야기했습니다. 이곳에서 노동자들이 쉬고 있다고.


[인천 부평 산단 노동자]
"공간이 한 평도 안 되고요. 계단 아래에 있는 곳이어서 곰팡이가 껴 있고, 과거에 기름 같은 걸 보관하던 위험물 창고였어요. 무엇보다 냄새가 좀 굉장히 많이 심한 휴게실이라고 할 수 있죠. 휴게실도 아니죠. 기름 냄새, 그 곰팡이 냄새가 매우 심해서 거기서 진짜 한 10분 15분만 있어도 머리가 너무 아파서 환기를 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회사는 '그 문을 열게 되면 통행에 방해된다'고 얘기를 하고 있고요."
 

다른 산단도…"저희 같은 사람은 쉴 곳 없어요"

혹시 특정 산단 내 사업장의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이번엔 경기 반월·시화 국가산업단지를 직접 찾아갔습니다. 산단에 도착해 차를 주차하자마자, 사업장 밖에 간이 의자 하나 놓고 한숨 돌리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안에 휴게실이 있는지 묻자 곧바로 무심하게 "없어요"라는 짧은 한마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근로자들이 식당을 오가는 점심 시간을 이용해 취재를 이어갔습니다. "사업장에 휴게실이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쉴 데가 어딨냐"고 반문했습니다. 하지만, 카메라를 보고는 대부분 말을 아끼며 식당 안으로 바삐 들어갔습니다.

한 사업장의 노동자는 곧 퇴직을 앞두고 있어 회사를 떠나는 마당에 인터뷰하겠다며, 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반월시화 산단 노동자]
"휴게실... 아예 쉬는 데가 없죠. 탈의실밖에 없어요. 옷 갈아입는 데. 탈의실이 휴게실이지. 탈의실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그냥 일하고 그렇죠 뭐. 못 앉아 있는 사람은 나오기도 하고. 근데 쉴 데 없으니까 그냥 막 이렇게 운동하고 그냥 아무 데나 그냥 앉아있다가 시간 되면 일하고 그렇지요."

그는 체념한 듯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냥 먹고 사는 게 이렇구나 생각하고, 그냥 그러고 다녔지 뭐. 내가 편안하게 와서 쉴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 일하려면... 그런 데는 없잖아요. 저희 같은 사람은 안 그래요? 그것도 뭐 좀 직책이나 있고 좋은 데서 일하면 모를까, 이런 이런 회사 다 거의 그럴 걸요?"

먹고 사는 것, 저희 같은 사람, 직책. 그의 마지막 말에서 몇몇 단어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아, 이분들에겐 휴게시설이 없거나 열악한 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고,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반월시화 산단의 또다른 노동자도 "탈의실이라고 남자 여자 분리도 안 돼 있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 서로 이제 눈치만 보다가 못 쉰다"고 말했습니다. 탈의실마저 분리가 안 돼 있어 휴게실로 쓸 수 없는 웃지 못할 씁쓸한 상황이 매일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너무 피곤할 땐?…'배회하기', '서서 졸기', '바닥에 앉기'

그럼, 쉴 곳이 없는데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을 땐 어떻게 하는지 산단 노동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냥 일하거나, 점심 식사 후에 배회하거나, 서서 졸기도 한다는 게 이들의 답이었습니다.

[반월시화 산단 노동자]
"이렇게 딱 서 가지고 짝다리 잡고 서서 졸아요. 그냥 정신 없이 가만히 서 있어요. 진짜 힘들 때는 딱 의자 하나 갖다 놓고 쉴 때도 있고. 그냥 조그만 의자 있잖아요, 우리 식당 가면 있는 그런 의자. 그거 갖다 놓으면 그 자리가 그냥 쉬는 장소예요."

[반월시화 산단 노동자]
"쉬고 싶을 때? 그냥 못 쉬고 그냥 이렇게 했는데. 그냥 이렇게 배회하고 그랬어요. 저희는 그랬어요. 저희는 여기 10년 동안 일하면서 뭐 별로 이렇게 편안한 공간에서 못 쉬었어요."

노동자들이 직접 자신이 쉬는 곳을 촬영해 제보한 사진들을 보면, 어떤 노동자들은 휴게실이 없어서 사업장 안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아 식사를 하고 쉬거나, 사업장 앞에 타이어를 깔고 앉거나, 그냥 맨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공동 휴게시설 절실한데…'명당'이 되어버린 편의점 앞

산단의 경우, 작은 사업장들이 많이 몰려 있습니다. 이런 사업장에서는 사업주들이 개별적으로 휴게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녹록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여러 사업장이 함께 쓸 수 있는 공동 휴게시설이 절실합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공동 휴게시설 자체를 처음 들어본다"고 말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점심 후 편의점과 매점 앞이 인기 좌석일 정도입니다. 사업장 안에 휴게실이 없어서 점심 식사 후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쉬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기자]
"여기가 제일 좋은 휴게실인가요?"

[반월시화 산업단지 노동자들]
"명당이에요. 명당, 여기가."
"이 동네에서는 명당이에요 여기가."

매점 앞에 설치된 테이블에서 쉬고 있던 노동자들도 인터뷰를 기다렸다는 듯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반월시화 산단 노동자]
"이렇게 벤치가 마련돼 있으면 그나마 앉아서 잠깐 잠깐 쉴 수가 있는데, 이제 그런 벤치가 마련돼 있는 건 말 그대로 이제 편의점에 설치돼 있는 간이 의자라든가 그리고 매점 앞에 이런 의자가 전부란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벽에 기대서 앉아서 쭈그리고 앉아서 쉬어야 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공간 확보를 해주고 간단하게라도 설치를 해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휴식, 안전사고·건강과 직결되는데…사업장 인원 따라 차별

노동자들은 쉴 곳이 없는 상황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제조업 특성상 안전사고 걱정을 떨치기가 힘듭니다.

[반월시화 산단 노동자]
"사고라는 건 순식간에 나기 때문에 잠깐 이렇게 조는 사이에도 사고 나고 그러니까."

법무법인 '여는'의 박준성 노무사는 "휴게공간은 노동자들의 건강권과 바로 직결되는 문제"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는 "특히 뇌심혈관계 질환의 경우 안정적인 휴게 공간을 보장받았는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라며 "결국 이렇게 휴게시설이 보장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노동자들이 굉장히 건강이나 생명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도 "휴게시설은 현장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시설"이라며 휴게시설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 현장의 상황은 장관의 말과는 동떨어져있었습니다.

휴게시설은 안전사고, 건강과 직결되지만, 작은 사업장은 휴게시설이 없더라도 제재를 받지 않습니다. 사업장 크기에 따라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도 차별받고 있는 게 현실인 겁니다.

모든 사업장 휴게시설 의무화 됐지만…20인 미만 사업장은 사각지대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지난해 8월 18일부터 모든 사업장에 최소 6㎡의 휴게시설 설치가 의무화됐습니다. 하지만, 휴게시설을 설치하지 않을 경우 최대 1천5백만 원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대상은 상시 노동자 20명 이상 사업장, 그리고 10인 이상 사업장 가운데 청소원, 경비원, 배달원 등 7개 취약 직종 근로자를 2명 이상 고용한 사업장에 국한돼 있습니다. 상시근로자 20인 미만 사업장은 휴게시설을 설치하지 않거나 설치 관리 기준에 미달해도 제재를 받지 않아 그대로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겁니다.

특히, 평균 고용 인원이 20.6명으로 작은 사업장이 많은 산업단지들이 이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실제 민주노총이 지난해 전국 13개 지역 산단 4천21명 대상으로 실태 조사한 결과 43.8%가 휴게시설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박준성 노무사는 "사실 지금과 같이 사업장의 규모를 기준으로 휴게 공간 보장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어느 사업장에서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건강이나 환경, 그리고 생명의 가치에 차등을 주는 문제"라며 "오히려 열악한 작은 사업장일수록 조금 더 안정적인 휴게 공간이 더 필요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고용노동부도 소극적…산단 공동 휴게시설 예산 집행률 '0%'

이런 상황에서 고용노동부 예산 집행도 소극적입니다. 지난 8월 국회에 제출된 고용노동부의 '휴게시설 의무 설치 1년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고용노동부의 산단 공동 휴게시설 지원 등 산재 예방 시설 설치 예산으로 482억 원이 책정됐으나, 이 중 산단 공동 휴게시설 지원 예산 집행률은 0%였습니다.

한국산업단지공단 혹은 지자체 등 산단의 관리 주체들이 공동 휴게시설 예산 신청을 할 경우 50%에 달하는 비용을 자부담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산단 관리 주체들이 신청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고용노동부의 홍보와 신청 독려도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반월시화 산단 한 제조업체 사업주]
"나라에 휴게시설 예산이 있다고요? 알아야지 뭘 하죠. 이메일이라든지 팩스라든지 와야 하는데 뭐 그런 게 하나도 없는데. 저희는 사비로 휴게실 컨테이너 다 지었는데, 뭐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아니 뭐 사람이 조금이라도 쉬어야지 능률이 올라가니까요. 이렇게 소규모 공장에서는 아무래도 휴게실 설치하기가 힘들죠. 저희 직원 해봤자 저까지 합해서 4명밖에 안 되니까. 보시다시피 거의 다 작업 공간이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박준성 노무사는 "실질적으로도 개별 사업주들이 휴게시설 예산을 부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공동 휴게시설을 설치해서 이런 부분을 보완을 하자는 요구가 이어져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확보된 예산을 집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자의 건강권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의지가 약한 것 아닌가 이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의 산단 공동 휴게시설 비롯한 휴게시설 예산 집행률을 높이고, 중장기적으로는 휴게시설 설치 법안이 20인 미만 사업장에도 실효성을 가질 수 있도록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SBS '8뉴스'에 산단의 휴게시설 실태가 보도되자 고용노동부는 대책 보도자료를 내고 "산단에 공동 휴게시설을 설치할 경우 현재 50%인 산단 관리 기관의 자부담 비율을 조정하는 등 공동 휴게시설 설치를 위한 다양한 인센티브 부여 방안을 적극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산단 관리 기관을 중심으로 입주 기업 근로자들을 위한 공동 휴게시설 설치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관계부처, 입주자협의체 등 유관기관, 중앙-지자체 협의체와 공동 홍보하는 등 적극 협의해나갈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공동 휴게시설 설치를 위해 산단 관리 기관의 자부담 비율을 조정하는 등 대책을 세우겠다고 한 것은 늦었지만 다행인 일입니다.

정부의 대책 발표는 끝이 아닌 시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장실 속 휴게실'과, '곰팡이 슨 청소도구함 휴게실'이 어떻게 바뀔지, 앞으로 지켜볼 일입니다.

조을선 기자 sunshine5@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