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손진책 두 명인의 만남…오페라 ‘투란도트’ 바뀐 결말은?

허진무 기자 2023. 10. 29. 15:1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테너 이용훈(오른쪽)과 소프라노 이윤정이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각각 ‘칼라프’와 ‘투란도트’를 연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테너 이용훈이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칼라프’를 연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소프라노 이윤정이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투란도트’를 연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중국 공주 ‘투란도트’는 아름답고 냉혹하다. 결혼하고 싶은 남성은 목숨을 걸고 투란도트가 내는 수수께끼 3개를 풀어야 한다. 페르시아 왕자를 비롯한 수많은 남성들이 정답을 맞히지 못해 사형을 당했다. 망국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도 투란도트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부왕 ‘티무르’와 그의 시종 ‘류’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친 칼라프는 투란도트와 수수께끼 대결을 벌인다.

서울시오페라단이 지난 26일부터 29일까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서울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올렸다. 기자가 관람한 26일 첫 공연에선 세계적 테너 이용훈이 칼라프를 연기했다. 이용훈은 ‘리리코 테너’의 서정적 음색, ‘스핀토 테너’의 힘찬 음색을 모두 가진 ‘리리코 스핀토 테너’로 불린다. 20년 넘게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하며 ‘월드 클래스’ 반열에 오른 유명 성악가지만 한국에선 이날이 ‘데뷔 공연’이었다.

“밤이 지나 별들이 지고 새벽이 찾아오면 나는 승리하리라! 승리하리라!” 대표적인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는 칼라프가 투란도트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확신하며 부르는 곡이다. 이용훈은 넉넉한 성량과 섬세한 기교로 기대를 만족시켰다. 호리호리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를 길어올려 3000석 대극장을 꽉 채우는 것이 놀라웠다. 절정부의 고양된 감정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갑작스레 사라지는 느낌은 아쉬움을 남겼다. 류 역할의 소프라노 서선영이 ‘들어보세요, 왕자님(Signore, ascolta)’을 애절하게 부르고, 이용훈이 ‘울지 마라, 류(Non piangere, Liu)’로 화답하는 장면을 비롯해 감탄이 나오는 대목은 많았다.

<투란도트>는 ‘연극 거장’으로 불리는 연출가 손진책이 오페라에 처음 도전한 작품이기도 하다. 무대는 어두운 조명에 콘크리트 기둥을 수직으로 배치해 디스토피아 SF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인물들의 의상에서도 시대나 국가를 알아볼 수 없었다. 푸치니 원작은 고대 중국 베이징이 배경이지만 손진책은 이런 설정을 일부러 배제한 것으로 보였다. 원작 자체가 고증이 엉망인 ‘동양 판타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대에선 <투란도트>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왜곡된 편견(오리엔탈리즘)을 강하게 드러낸다고 비판받는다. 투란도트라는 이름부터 중국어가 아닌 페르시아어이다.

손진책은 고전 원작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해석해 연출하는 ‘레지테아터’를 시도했다. 오페라는 음악과 대사(가사)가 정해져 있어 재해석에 제약이 많은 장르다. <투란도트>가 그나마 다른 오페라보다 재해석의 폭이 넓은 이유는 푸치니의 미완성 유작이기 때문이다. 푸치니는 3막의 ‘류의 죽음’ 장면까지 작곡하고 1924년 사망했다. 후배 작곡가인 프랑코 알피노가 대신 결말을 완성했다.

소프라노 서선영이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류’를 연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원작의 결말은 칼라프의 강제 입맞춤에 투란도트의 마음이 녹아내려 둘의 사랑이 이뤄지는 것이다. 오페라가 익숙하지 않은 관객은 당혹스러울 만큼 조야한 감수성이다. 서양(칼라프)이 동양(투란도트)을 정복해 계몽시키는 의미를 담은 오리엔탈리즘적 서사라는 비판도 많았다. 유럽과 미국에선 수십 년에 걸쳐 새로운 결말이 여럿 나왔다.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사랑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류의 역할을 더 주체적으로 연출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원작과는 정반대로 투란도트가 칼라프의 이름을 맞혀 사형시키는 결말로 마무리한 공연도 있다.

손진책은 원작의 음악과 대사를 바꾸지 않으면서 현대 한국에 맞는 새로운 결말을 제시했다. 원작은 중국을 야만적인 폭력으로 민중을 지배하는 독재 왕정으로 묘사했다. 손진책은 중국 배경은 버리고 독재 왕정이란 설정만 가져와 ‘민중 해방의 서사’로 재해석했다. 투란도트는 칼라프의 구애를 받아들이는가 싶더니 류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어 모든 인물이 휘황한 빛을 받으며 행진하듯이 무대로 걸어나온다. 민중은 검은색 의상을 흰색 의상으로 갈아입고 재등장한다. 투란도트는 칼라프가 아니라 류의 손을 잡고 칼라프의 이름이 ‘사랑’이라고 외친다.

손진책의 새 결말은 투란도트와 류를 주체적 여성으로 세우고,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사랑에서 사회적 메시지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극의 흐름이 원작 대사와 어울리지 않아 억지스럽다는 인상은 어쩔 수 없었다. 의미를 살리는 데 몰두하다 연정의 불을 허망하게 꺼뜨린 차가운 결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손진책은 지난 19일 기자간담회에서 “(원작의) 투란도트와 칼라프가 류의 죽음으로 사랑의 결실을 맺는 부분을 볼 때마다 괴기스러웠다. 류가 투란도트를 구원하면서 사랑의 승리를 민중의 행복으로 바꾸는 쪽으로 연출해보고 싶었다. 견강부회(牽强附會)식 해석이 약간 있을 수 있지만 큰 문제없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지난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오페라 <투란도트>의 한 장면. 세종문화회관 제공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