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병 있어도 뛸 수 있어요” 당원병 아이들의 마라톤 도전

이영빈 기자 2023. 10. 2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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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9일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2023 춘천마라톤. 당원병 환우회 참가자들이 출발 전 포즈를 취했다. /김지호 기자

몇몇 부모는 귀를 의심했다. 10km 마라톤이라니. 강윤구 연세대 원주세브란스 교수가 말했다.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아이들,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옆에서 강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원병’은 10만명 중 1명 꼴로 발생하는 희소병이다. 한국에 공식 등록된 환자는 약 250명. 보통 사람은 섭취한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바꿔 저장해 뒀다가, 필요할 때 특정 효소를 이용해 글리코겐을 다시 포도당으로 전환해 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 당원병 환자에겐 이 효소가 없다. 저장을 못하니 들어온 포도당을 다 쓰면 저혈당 쇼크가 온다. 그렇다고 계속 영양을 섭취하면 글리코겐이 쌓여 간이 망가진다. 보통 병원은 간이식을 권한다. 당원병 환자 5살 아들을 둔 배준호(41)씨는 “확진을 받고 인터넷에 찾아봤는데, ‘죽을 병’이라고만 나오더라. 눈 앞이 깜깜했다”고 했다.

강윤구 교수는 전임의(펠로우) 시절 우연히 행사에 참여해 당원병을 알았다. 2018년 미국에서 당원병 관리법을 배워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혈당 수치를 파악한 뒤 미국에서 제작된 옥수수 100% 특수 전분을 하루 4번에서 최대 12번 섭취시킨다. 글리코겐을 쌓지 않고도 영양을 보충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일반 탄수화물을 금하면 간이식을 하지 않고도 일상 생활이 가능하다. 강 교수를 보러 당원병 소아 환자 중 90%가 원주세브란스로 몰린다. 강 교수는 본인의 24시간을 총동원해 110여명 환우들을 본다. 일반 진료 시간 뿐 아니라 일대일 메신저로 운동, 음식 등 일상 생활을 전부 확인한다. 이들은 강 교수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강윤구 교수가 마라톤을 이야기하니 부모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부모들은 ‘통잠’을 잔 기억이 까마득하다. 5살 서진이 아버지 김은성(48) 당원병환우회장은 혈당 조절을 위해 새벽에 2~3번씩 아이를 깨워 옥수수 전분을 먹인다. 잠에 덜 깬 채로 전분을 먹는 아이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몰래 눈물을 훔친 게 부지기수다.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보낼 때도 교사에게 혈당 확인, 옥수수 전분 섭취 등을 몇 번이고 부탁한다. 김 회장은 “일반 아이들에 비해 체력도 많이 떨어지고 체구도 작다. 외출할 때도 사실 큰 마음을 먹는다. 마라톤은 꿈도 못 꿨다”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의지가 확고했다. 희소병 환자라고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김준이(11)양은 “사실 막상 뛴다고 하니 두렵기도 했다. 그래도 준비를 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그래도 부모들은 “사실 완주는 힘들 거라고 생각한다. 참가에 의의를 두겠다”고 입을 모았다.

29일 오전 10시 서울, 충북 청주, 강원도 원주 등 각지에서 당원병 환우들이 뭉쳤다. 그리고 2023 춘천마라톤(조선일보사·스포츠조선·대한육상연맹 공동 주최) 10km 부문 출발선에서 아이들 8명, 부모 12명이 함께 발걸음을 뗐다. 부모들의 허리춤에는 옥수수 전분을 넣은 약물병이 채워져 있었다. 강윤구 교수는 긴급 시 혈당을 높일 설탕물 등을 목에 메고 행렬 맨 뒤에서 따라갔다.

처음엔 아이들이 앞서 나갔다. 오히려 어머니 아버지들이 허둥지둥대며 따라가기 바빴다. 그러나 5km 반환 지점에서 아이 셋이 주저 앉았다. 처음에 너무 힘을 뺀 탓이었다. 선두 행렬을 따라가지 못하고 진작 걷는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는 애가 탔다. 한 어머니는 ‘더 열심히 준비해서 다음 해에 도전할까’라고 묻기도 했다.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끝까지 뛰겠다고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이준호(가명)군은 씩씩하게 “여기서 끝내면 아쉽다. 기왕이면 끝까지 뛰자”고 했다. 그러면서 발을 느리게 한 걸음씩 내딛었다. 부모는 아이를 믿기로 했다.

첫번째 아이가 1시간30분31초의 기록으로 결승선을 밟았다. 이날 10km 최고 기록은 34분16초였다. 보통 기록도 40~50분. 조금 늦었지만 속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속속들이 결승선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들어오자마자 옥수수 전분을 탄 물을 마시며 숨을 돌렸다. 김호수(17)군은 “이렇게 긴 거리를 뛴 건 처음이다. 막상 해보니 거뜬했다”고 했다. 노승현(11)군은 웃는 얼굴로 “정말 뿌듯하다”고 힘차게 소리쳤다. 중학교 3학년 딸과 함께 완주한 어머니 박소정(45)씨는 “막상 뛰니깐 아이는 ‘슝’ 뛰더라. 내가 오히려 뒤처져서 힘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출발한지 약 2시간만에 마지막으로 이준호 군이 들어왔다. 너무 늦어 공식 기록은 받지 못했지만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중간에 포기하기 싫었다”면서 목에 건 완주 메달을 들어보였다. 준호군의 아버지는 “우리 가족은 원래 걱정이 없는 집이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도 뭐든 할 수 있다”며 활짝 웃었다. 부모들의 걱정과는 달리 아이 8명이 전부 완주에 성공했다.

2023년 10월 29일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2023 춘천마라톤. 당원병 환우회 참가자들이 출발 전 포즈를 취했다. /김지호 기자

강윤구 교수는 준호군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안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강 교수는 “사실 걱정을 안 하지는 않았다. 내가 제안했지만서도 조금 그랬다. 그래도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등록된 희소병이 1000가지가 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은 방에만 누워있고 운동도 못한다는 인식이 많다. 그런데 오늘 봐라. 엄청 잘 뛰었다. 아이들이 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알아야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대견하다”고 했다.

이날 아이들이 오지 못한 부모들도 있었다. 아직 너무 어리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날 10km 완주에 성공한 김은성 환우회장은 “고민하다가 아이가 독감에 걸려 오지 못했다. 내년에는 우리 아이도 와서 함께 뛰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뭐든 못 할 건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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