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BTS보다 훨씬 전에 미국 진출해 스타가 됐던 걸그룹이 있었다?!
1950년대, 60년대, 미국에서 스타가 된 한국의 걸그룹이 있습니다. 당대 정상급 가수들만 출연하던 인기 TV쇼 에드 설리번 쇼에 22번이나 출연했고, '라이프' 잡지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주급이 요즘 가치로 한화 1억 7천만 원! 라스베이거스 고액 납세자 상위권에 올랐고, TV 뿐 아니라 미국 전역 순회공연과 해외 무대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걸그룹은 '김 시스터즈'입니다. '목포의 눈물(1935)'로 당대를 풍미했던 명가수 이난영이 자신의 딸인 숙자와 애자, 그리고 조카 민자(이난영 오빠인 작곡가 이봉룡의 딸)를 입양해 구성한 자매 그룹입니다.
이난영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작곡가였던 남편 김해송이 북한으로 납치된 후, 7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합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이난영은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미군 무대에 데뷔시킵니다. 이난영은 엄격하게 아이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연습생 트레이너와 프로듀서 역할을 다 한 셈입니다. 아이들은 영어는 몰라도 당시 미국서 유행하던 컨트리 음악이나 팝송 가사를 들리는 대로 외워 부르고, 춤추고, 악기도 연주하면서 주목받았습니다.
김 시스터즈는 1959년, 라스베이거스 공연 제안을 받고 낯선 땅 미국으로 떠납니다. 맏언니 숙자가 19살일 때였습니다. 한국을 떠나는 김 시스터즈에게 이난영은 이렇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성공하기 전까지는 한국에 돌아올 생각 하지 말아라. 팀이 깨질 수 있으니 연애는 절대 안 된다. 노래 잘하는 시스터즈 그룹은 미국에도 많으니 성공하려면 특별한 게 있어야 한다. 악기는 닥치는 대로 다 배워라."
김 시스터즈는 1959년 2월 라스베이거스의 한 호텔에서 '중국 인형 쇼(China Doll Revue)'라는 공연에 처음 출연합니다. 처음엔 4주 계약을 맺고 왔지만, 이들의 깜찍한 노래와 춤이 큰 인기를 끌면서 계약은 계속 연장되었고 새로운 출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의 레퍼토리는 주로 스윙 재즈나 팝송을 커버한 곡이었는데요, 빡빡한 일정 중에도 잠을 줄여가며 매일 8시간씩 연습했습니다. 엄마가 그립고 음식도 입에 잘 안 맞고 고국이 그리워 눈물 지을 때도 많았지만, 무대에 서기만 하면 기운이 솟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친숙했던 무대는 '우리 집 안방' 같은 곳이었으니까요.
김 시스터즈는 이난영이 신신당부했던 대로, 닥치는 대로 악기를 익혔습니다. 한국에서부터 이미 숙자는 테너 색소폰과 기타를, 애자는 알토 색소폰과 베이스를, 민자는 드럼을 연주했고, 전통 악기인 가야금, 장구, 북도 배웠습니다. 여기에 새로 익힌 악기 실력까지 더해지니 김 시스터즈가 연주할 수 있는 악기는 20가지 종류가 넘었습니다. 악기 연주는 당시 미국에도 많았던 다른 걸그룹과 이들을 차별화하는 '필살기'가 되었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딘 마틴 같은 당대 톱스타들이 김 시스터즈에게 호감을 드러내며 접근해도, 이난영이 당부한 대로 'No Date' 원칙을 고수하며 거절했습니다.
김 시스터즈는 당대의 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국 최고 인기 TV 음악 쇼였던 에드 설리번 쇼에 아시안 그룹으로는 처음 출연했습니다. 이들은 종종 한복을 입고 공연했고, 한국 전통 악기와 민요를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김 시스터즈는 1960년대 미국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얼굴'이었습니다.
미국 진출 4년 후인 1963년, 김 시스터즈는 이난영과 네 명의 남동생들을 미국으로 초청합니다. 이난영은 당시 8개월간 미국에 머무르면서 김 시스터즈의 무대에서 함께 노래했는데요, 1963년 에드 설리번 쇼에 김 시스터즈와 함께 출연한 이난영은 흑인 영가에 한국어 '아리랑 아리랑'을 능숙하게 녹여내면서, 멋진 무대를 선사합니다. 김 시스터즈도 영어 가사를 어머니에 관한 내용으로 바꿔 불렀고요. (▶무대 영상 보기)
[ https://www.youtube.com/watch?si=eA42sdctikwtKe7z&v=7hxLq4scJ5A&feature=youtu.be ]
성공할 때까지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피붙이를 낯선 땅으로 보내면서 어머니는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요. 이난영은 김 시스터즈와 미국에서 함께 노래하며 얼마나 벅찬 감동을 느꼈을까요. 그는 김 시스터즈의 성공을 직접 확인하고 마음을 놓았을 것 같습니다. 이때 딸들에게 내렸던 '데이트 금지령'도 풀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 시스터즈를 오랜만에 만나고 귀국한 이난영은 다음 해인 1964년 세상을 떠납니다.
김 시스터즈는 1970년 한국에서 성대한 귀국 공연을 엽니다. 이즈음 발표한 김 시스터즈의 유일한 한국어 노래 '김치 깍두기'는 경쾌한 곡이지만 오랜 타향 생활의 애환과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머나먼 미국 땅에 십 년 넘어 살면서 고국 생각 그리워 아침저녁 식사 때면 런치에다 비후스텍 맛 좋다고 자랑 쳐도 우리나라 배추김치 깍두기만 못하더라 코리아의 천하명물 김치 깍두기 깍두기 자나 깨나 잊지 못할 김치 깍두기~"
김 시스터즈 멤버들 중 애자는 1980년대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숙자는 미국에, 민자는 헝가리에 살고 있습니다. 2015년 김 시스터즈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다방의 푸른 꿈'(▶영화 예고편 보기)이 개봉했을 때, 2016년 이난영 탄생 100주년 때 각각 민자와 숙자가 한국을 찾았습니다. '김 시스터즈'가 다시 조명받는 계기가 되었죠. K팝 약진과 함께 '해외 진출 원조 걸그룹'으로 종종 호명되었고요. 하지만 저에게 김 시스터즈는 여전히 '이름은 들어봤지만, 잘 모르는 옛날 가수'일 뿐이었습니다. 뮤지컬 '시스터즈'를 보기 전까지는요.
[ https://www.youtube.com/watch?si=SnwLoDqouNFg0XiD&v=iEKzzMI_zco&feature=youtu.be ]
뮤지컬 '시스터즈'는 한국의 걸그룹 계보를 그려내는 뮤지컬입니다. 한국 걸그룹 중에 시대를 반영하고 음악사적 의미가 있는 걸그룹 6개를 골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이들의 활약상을 보여줍니다. '시스터즈'에서 가장 처음 소개하는 걸그룹은 '저고리 시스터즈'인데요, 일제 치하였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했습니다.
'저고리 시스터즈'는 OK레코드 설립자이며 흥행의 귀재로 불렸던 이철이 결성한 걸그룹이었습니다. '목포의 눈물'로 스타가 된 이난영을 리더로, '연락선은 떠난다'를 부른 장세정, '오빠는 풍각쟁이'를 부른 박향림 등 인기 가수들로 만든 걸그룹이죠. 멤버들이 들락날락했지만 5~6명 정도로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팀 이름처럼 무대 의상으로 저고리를 입고 나와서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민족의식을 환기시켜 주는 역할을 했다고 하지요. '저고리 시스터즈'의 노래 중에 남아있는 것은 뮤지컬 '시스터즈'에서 재현한 '처녀 합창' 한 곡입니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 걸그룹 원조 '저고리 시스터즈' 멤버였다는 것은 뮤지컬 '시스터즈'를 보고서야 처음 알았습니다. '저고리 시스터즈' 다음 세대인 '김 시스터즈'가 이난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았고요. 아마도 이난영이 아이들을 데리고 '김 시스터즈'를 만든 데에는 '저고리 시스터즈'로 활동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초창기 걸그룹의 계보가 이렇게 이어지고 있더라고요.
뮤지컬에선 김 시스터즈의 유명한 공연 장면(▶공연 영상 보기)이 8분에 걸쳐 재현됩니다. 김 시스터즈는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이라는 신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다채로운 악기 연주 실력도 뽐내는데, 배우들은 이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벤조, 클라리넷, 마림바 같은 악기를 배워 실제로 연주합니다. 미국에서 흥과 끼를 마음껏 펼쳐낸 김 시스터즈의 젊은 시절이 바로 제 눈앞에서 펼쳐졌습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si=J-Bi4VtcGC3ofnQ5&v=rHA0IKQuzvw&feature=youtu.be ]
뮤지컬 '시스터즈'는 이어 윤복희가 활동했던 코리안 키튼즈, '울릉도 트위스트' '워싱턴 광장' 등 수많은 히트곡의 주인공 이 시스터즈, 쌍둥이 자매로 구성된 바니 걸스, 그리고 인순이가 소속됐던 희자매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 뮤지컬을 연출한 박칼린 씨와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서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수현 문화전문기자 shkim@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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