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야해서, 수입금지, 창씨개명까지 당했는데…뜻이 XX라고? [김기정의 와인클럽]

김기정 전문기자(kim.kijung@mk.co.kr) 2023. 10. 29. 13:4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기정의 와인클럽 22- 예술을 담은 와인(1)

이탈리아 와인 ‘소포코네(질식)’의 미국판 라벨. 한 여성이 무릎을 꿇은 채 검은 공간을 응시하고 있다. 외설적이란 이유로 미국 판매가 금지된 후 바뀐 라벨이다.
긴 머리의 한 여성이 무릎을 꿇고 깜깜한 공간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엇을 하는 것일까요. 이 그림은 미국에 수입된 이탈리아 와인의 라벨입니다. 원래 라벨이 너무 선정적이란 이유로 수입이 금지됐다가 라벨 이미지를 지금처럼 수정한 뒤에야 미국에 다시 수입이 허용됐습니다. 한국에는 오리지널 라벨을 붙인 채 정식 수입된 와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와인의 이름은 소포코네(Soffocone). 질식(Suffocation)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이탈리아어입니다. 일상 대화에서는 ‘허풍쟁이’란 의미로 사용됩니다. ‘질식’이란 단어가 왜 ‘허풍쟁이’란 의미가 됐을까요. 이 그림 속에서 힌트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 김기정의 와인클럽은 ‘예술’을 담은 와인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다음부터는 ‘19금’ 이미지와 내용이 담길 수 있으니 원하지 않으시면 여기까지만 읽기를 바랍니다.

◇와인 생산자가 된 예술가 비비 그라츠
비비 그라츠가 만든 이탈리아 와인 소포코네. 한국에 수입된 제품의 라벨로 미국판과 차이가 있다.
한국에 수입된 소포코네 와인의 디자인입니다. 미국판 라벨 이미지와 다르게 좌우 상단에 무언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모습인지는 아리송합니다.

지난 2020년 6월 미국 경제지 포브스(Forbes)는 와인 생산자이자 ‘예술가’인 비비 그라츠를 조명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빈칠리아타(Vincigliata)에 위치한 중세시대 성(castle)을 물려받습니다. 성 주위를 포도밭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비비 그라츠는 2000년 부터 직접 와인 생산을 시작합니다. 비비 그라츠는 유명 조각가의 아들로 그 자신도 예술을 전공했습니다. 와인 라벨의 디자인을 자신이 직접 디자인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미국서 문제가 된 ‘소포코네’와인의 라벨도 비비 그라츠의 학생 때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탈리아 와인 생산자 비비 그라츠의 성. 성 주위 포도밭은 지역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 유명하다.
◇‘질식’이 일어나는 포도밭...그리고 ‘허풍’
비비 그라츠가 대중들에게 ‘소포코네’라고 와인 이름을 지은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 와인은 미국서 문제가 됩니다.

비비 그라츠가 빈칠리아타에 보유한 포도밭은 지역의 젊은 남녀들에게 아주 훌륭한 사랑의 장소였다고 하네요. 와인 이름을 직역하면 ‘빈칠리아타 포도밭에서의 질식’ 정도가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소포코네(질식)라는 단어가 그 지역에서는 ‘속어’로 구강성교, 펠라치오(Fellatio)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비비 그라츠는 자신의 포도밭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이 ‘질식’할 수 있는 상황을 예술적으로 와인 라벨에 옮긴 것이죠. 유럽에는 “여자는 입으로 남자를 지배한다”는 얘기도 있다네요.

정작 이탈리아에선 소포코네라는 단어를 ‘허풍쟁이’란 의미로 사용한다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상보다 엄격했던 미국 소비자들
무심코 넘어갔던 미국의 소비자들이 비비 그라츠의 얘기를 듣고 와인의 라벨을 찬찬히 다시 봅니다.

맙소사! 왼쪽 상단에 남성의 성기가 그려져 있고 여성은 무릎을 꿇은 채 구강성교를 하는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깜짝 놀란 미국 정부는 소포코네 와인의 수입을 금지합니다. 비비 그라츠는 예술가였지만 동시에 와인 사업가로서 상단의 성기 모양을 모두 검은색으로 지운 채 미국에 와인을 수출합니다.

미국의 술 광고가 얼마나 선정적인지 경험해 본 독자들이라면 미국 정부의 조치가 이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와인의 라벨에는 어떤 종류의 성행위나 이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못하게 돼 있다고 합니다. 미국이란 나라는 ‘성’에 자유로울 것 같지만 상당히 엄격한 청교도 정신이 생활 곳곳에 배어 있습니다.

◇이탈리아선 남녀 성기를 음식 이름으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처녀의 유두’라 불리는 디저트 음식.
‘소포코네’에 대한 이탈리아 내에서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미국인들이 ‘생활 속 유머’를 즐기지 못한다고 혀를 찼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와인은 음식이고 삶이고 생활입니다. 사실 이탈리아 음식 이름에는 남녀의 성기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들도 많습니다.

이탈리아 파스타 중에 뇨키(Gnocchi)는 감자, 밀가루, 달걀, 소금 등을 사용한 덩어리 반죽으로 한국의 수제비와 비슷합니다. 뇨키라는 이름은 나무 옹이와 주먹 너클(knuckle)에서 나왔다는게 정설이지만,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뇨키의 모양과 촉감 때문입니다.

비비 그라츠가 와인을 생산하는 투스카니 지역에는 팔레 델 논노(Palle del Nonno)라는 ‘살라미’ 음식이 유명한데요. 직역하면 ‘할아버지의 고환’입니다. 축 늘어진 노인의 고환을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고문받고 있는 시칠리아의 성 아가타.
시칠리아에는 ‘처녀의 유두’라 불리는 디저트가 있습니다. 여성의 하얀 가슴을 닮은 빵 위에 붉은 체리를 올려놓은 모양으로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원래 스토리를 알고 나면 이 음식은 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가타 빵’으로도 불리는 이 음식은 사실 시칠리아의 성녀 아가타를 기리는 것입니다. 가슴 모양의 빵 위에 올려진 빨간 체리는 고문으로 인한 ‘피’를 상징합니다.
◇카마수트라의 나라에서는 ‘옷’을 입히기로
인도 카마수트라에 등장하는 64가지 사랑의 체위를 손바닥에 문신한 모습.
소포코네 와인 라벨은 인도에서도 문제가 됐습니다. ‘사랑’의 각종 체위를 담은 ‘카마수트라’(Kama Sutra)의 나라인 인도에선 성적인 것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 자체는 문제가 안 됐다고 합니다. 대신 옷을 걸치지 않은 여성의 나신이 문제가 됐습니다. 인도에선 식음료에 누드 이미지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합니다.

비비 그라츠는 그 소식을 듣고 펜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직접 병 하나 하나의 라벨에 색을 칠합니다. 여성의 몸에 옷을 입힌 것이지요. 최근 비비 그라츠 와인에서 세일즈와 마케팅을 담당하는 빈센조 단드레아 디렉터가 한국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다 소포코네 와인이 화제가 됐습니다.

그는 검은 펜을 집어 들더니 과거 비비 그라츠가 했던 것처럼 똑같이 와인 라벨에 색을 칠하더군요.

인도에서는 비비 그라츠의 ‘소포코네’ 와인이 한정판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한 와인 평론가는 “와인 생산자의 개인적인 사인을 모으는 와인 애호가들이 많다. 비비 그라츠의 소포코네 와인에는 이미 그의 사인이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 와인생산자 비비 그라츠가 와인 라벨 속 여성의 몸에 색칠을 하고 있다 .
◇‘라벨’은 거들 뿐, 와인 평론가로 부터 호평
비비 그라츠 와인이 라벨로만 승부를 했다면 큰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비비 그라츠 콜로레 2013년 빈티지는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으로 부터 99점을 받으며 최고의 이탈리아 와인으로 뽑혔습니다. 테스타마타 2006년 빈티지도 98점을 받으며 비비 그라츠는 순식간에 이탈리아 최정상급 와인 생산자의 반열에 오릅니다.

물론 비비 그라츠의 ‘소코포네’ 이야기는 와인 판매에 큰 도움이 됐을 겁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비비 그라츠의 관계자가 여인에 옷을 입힌 라벨을 보여주고 있다.
◇피카소의 그림을 담은 샤토 무통 로칠드
피카소의 그림을 라벨로 쓴 샤토 무통 로칠드 1973년 빈티지. 1973년은 샤통 무통 로칠드가 1등급으로 승급한 해이며, 동시에 피카소가 세상을 떠난 해다.
와인에 담긴 ‘예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와인이 샤토 무통 로칠드입니다. 프랑스 보르도의 1등급 그랑크뤼 와인으로 해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티스트의 예술작품을 라벨로 사용합니다. 그중에는 피카소의 스토리가 흥미롭습니다. 샤토 무통 로칠드의 소유주인 필립 드 로칠드 남작은 피카소에게 와인 라벨을 그려줄 것을 부탁했으나 동의를 얻지 못합니다. 샤토 무통 로칠드 와인은 당시만 해도 2등급 와인이었습니다.

마침내 1973년 샤토 무통 로칠드는 1등급 와인으로 승급합니다. 1855년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등급이 만들어진 이후 처음이었고 샤통 무통 로칠드 이후로는 1등급 승급은 지금 까지도 사례가 없습니다. 그런데 1973년 피카소가 세상을 떠납니다. 로칠드 남작은 피카소의 유가족에 허락을 구했고 기념비적인 1973년 빈티지(포도 생산연도)에 피카소의 작품이 라벨에 오릅니다.

◇샤토 무통 로칠드도 검열당했다
사춘기 소녀의 모습을 그린 프랑스 화가 발튀스의 작품은 샤토 무통 로칠드 1993년 빈티지에 들어갔다. 미국이 라벨을 문제삼자 아예 그림을 없앤 제품을 미국서 출시했다.
샤토 무통 로칠드의 세계적인 예술작품 라벨과 비비 그라츠의 소포코네 와인을 단순 비교하는 게 무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샤토 무통 로칠드 와인도 라벨 때문에 미국서 수입을 거부당한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화가 발튀스의 작품을 담은 샤토 무통 로칠드 1993년 빈티지가 수입 금지된 와인입니다. 발튀스는 에로틱한 포즈의 사춘기 소녀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결국 발튀스의 누드 크로키 라벨을 붙인 1993년 샤토 무통 로칠드는 미국서 판매금지를 당합니다. 샤토 무통 로칠드는 미국시장서는 라벨에 그림이 없는 제품을 내놓았는데 이게 오히려 화제가 되며 와인 애호가들의 주요 수집 대상이 됐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샤토 무통 로칠드는 2010년 빈티지에는 미국의 유명 아티스티 제프 쿤이 보티챌리의 ‘비너스 탄생’을 재해석한 라벨을 내놓았습니다. 누드의 비너스때문에 논란이 됐지만 미국시장서 판매가 허용됐습니다.

다음주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와인 라벨에 사용한 사례들을 모아 소개하겠습니다.

김기정 매일경제신문 컨슈머전문기자가 와인과 관련해 소비자들이 궁금해하는 내용들을 풀어드립니다. 김 기자는 매일경제신문 유통팀장, 식품팀장을 역임했고 레스토랑 와인 어워즈(RWA), 아시아와인트로피 , 한국와인대상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네이버 기자페이지에서 ‘구독’을 누르면 쉽고 빠르게 와인과 관련한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질문은 kim.kijung@mk.co.kr로 해주세요.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