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52 전략폭격기는 '핵'을 달고 왔을까... 미국의 모호 전략 [문지방]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지난 19일 오후 충북 청주시 청주공군기지에는 강한 빗줄기가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이 빗줄기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물체가 격납고 앞에 서 있었습니다. 미군의 대표적 전략무기 중 하나인 B-52H ‘스트라토포트리스’였습니다. 날개 폭 56m에 달하는 B-52H는 한쪽 날개 앞에 성조기를, 다른 날개 앞엔 태극기를 달고 당당한 모습을 자랑했습니다.
B-52H는 지난 17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개막한 서울국제항공우주 및 방위산업전시회(ADEXㆍ아덱스) 행사장 상공을 비행했습니다. 또 같은 날 한미 연합공군 훈련을 하고 청주기지에 착륙했습니다. B-52H가 우리 공군기지에 착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공약인 대북 확장억제를 단적으로 보여준 셈입니다.
美 공군 '3대 전략폭격기'... 순항 핵미사일 능력 '유일'
B-52H는 B-1B ‘랜서’, B-2 ‘스피릿’과 더불어 미 공군의 3대 전략폭격기로 꼽힙니다. 1962년 마지막으로 생산됐으니 가장 ‘젊은’ 기체도 환갑을 넘었습니다. 1974년 초도 비행을 한 B-1B와 1989년 첫 비행을 실시한 B-2에 비해서 상당히 오래된 셈입니다. 하지만 B-52H가 현역으로 뛰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미국 전략폭격기 중 유일하게 순항 핵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다는 점이죠.
미군은 핵탄두 탑재 항공기발사순항미사일 AGM-86B ALCM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AGM-86B는 당초 B-1과 B-2에서도 발사가 가능했으나 냉전시기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체결로 현재는 B-52H에서만 발사가 가능합니다. B-52H가 청주기지에 착륙한 모습이 공개되자 북한이 “미국은 조선반도가 법률적으로 전쟁 상태에 있으며 적측 지역에 기어드는 전략자산들이 응당 첫 소멸 대상으로 된다는 데 대해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핵 탑재, 확인도 부인도 못 한다'... 미묘한 기류
청주기지에 착륙했던 B-52H는 핵무기를 탑재했을까요. 당연히 현장에서는 관련된 질문이 나왔습니다. 기자들이 ‘(폭격기) 안에 핵무기가 있느냐’고 묻자 미 공군 96 폭격비행대대 대대장 바네사 윌콕스 중령은 “확인해 드릴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We cannot confirm or deny)”며 “다만 우리 비행기는 항상 안전하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전형적인 ‘NCND(Neither Confirm Nor Denyㆍ확인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수사죠.
이어지는 질문에 미군 측은 미묘한 어조를 꺼내들었습니다. 윌콕스 중령은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항공기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핵과 재래식 무기 모두 (탑재) 가능한 항공기”라고 답했습니다. ‘재래식 무기들이 탑재되어 있느냐’는 질문이 이어지자 “그렇지 않다”며 말을 흐리고는 “무기 장착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할 수 없다”고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이날 현장을 찾았던 한 관계자는 “핵(무기)을 탑재했냐는 질문에 미군 측 일부 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귀띔했습니다. 당시 미군 측 공보 관계자가 핵무기 탑재 관련 질문을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고도 합니다. 고갯짓의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목이 갑자기 뻐근해서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요.
워싱턴 선언 속 '한반도 비핵화' 한국의 오랜 공약... 모호한 답변밖에
이쯤에서 윌콕스 중령의 답변을 해석해봐야 합니다. 상식선에서 볼 때 미군의 핵심 전략 자산 B-52H가 아무 무기를 탑재하지 않고 모기지인 미국 루이지애나주 박스데일 기지에서 한국까지 직항으로 날아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윌콕스 중령은 재래식 무기 탑재 여부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사실상 핵무기 탑재 가능성을 흘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답은 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지난 4월 26일 한미상호방위조약(한미동맹) 체결 70주년을 맞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워싱턴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워싱턴 선언을 잘 읽어보면 미국이 왜 모호한 대답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워싱턴선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국제비확산체제의 초석인 핵확산금지조약(NPT)상 의무에 대한 한국의 오랜 공약 및 ‘대한민국 정부와 미합중국 정부 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력 협정(한미 원자력협정)’ 준수를 재확인하고 △한미 간 차관보급 상설협의체 ‘핵협의그룹(NCG)’을 신설하며 △전략핵잠수함의 한국 기항 등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을 증진한다는 내용입니다.
NPT에 따르면 핵무기 보유국은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양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비보유국은 핵무기를 제조ㆍ획득해서는 안 됩니다. 또 ‘한국의 오랜 공약’ 부분이 중요합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11월 8일 우리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에 이어 같은 해 12월 18일 ‘한반도 핵부재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는 북한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채택했고 이듬해인 1992년 2월 19일 제6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남북 기본합의서’와 함께 공동선언을 발효했습니다.
'한반도 비핵화' 파기 논란 불거지면 북한에 빌미
한반도에 미국의 핵무기가 전개된다면 한반도 비핵화 선언과 어긋날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국방부 관계자는 워싱턴 선언 이후 기자들과 만난자리에서 “미국 전략자산이 한반도에 들어온다고 해도 시험·제조·생산 또는 보유·저장·사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북한에 빌미를 줄 수 있는 행동은 피하는게 안전합니다. 미국이 B-52H에 핵이 탑재됐는지 결코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워싱턴 선언 이후 한반도에는 지난 6월 미 해군 핵추진 순항미사일 잠수함(SSGN) 미시간함, 7월에는 미 해군 오하이오급 전략핵잠수함(SSBN) 켄터키함 등 주요 미 전략자산이 잇따라 기항했습니다. 켄터키함 기항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이종섭 전 장관은 “이번 미국 SSBN의 한반도 전개는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확장억제가 확고히 이행될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며 “북한에는 동맹의 압도적인 능력과 태세를,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에는 굳건한 한미 연합방위태세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당시에도 미군은 물론 우리 군도 켄터키함에 핵무기가 탑재되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켄터키함은 오하이오급 12번째 SSBN으로 트라이던트-Ⅱ 탄도미사일 약 20기를 적재할 수 있습니다. 트라이던트-Ⅱ 미사일은 미 해군과 영국 해군의 중추적 핵투사 수단이지만 워싱턴 선언에 담긴 ‘한국의 오랜 공약’과 ‘전략자산의 정례적 가시성 증진’이 충돌하면서 핵탑재 여부를 밝힐 수 없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북한을 움찔하게 하는데는 충분했겠죠.
김진욱 기자 kimjinu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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