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세 콘서트에서 ‘어려운 아름다움’을 보다···‘이지 뷰티’[책에서 건진 문단]

김종목 기자 2023. 10. 2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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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 [책에서 건진 문단]‘전맹의 미술관람자’ 시라토리···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2310210600001

‘책건문’ 네 번 째 책은 클로이 쿠퍼 존스의 <이지 뷰티>(안진이 옮김, 한겨레출판사)입니다. ‘easy beauty’ 뜻을 담은 문단은 중반 이후 소개하겠습니다.

존스는 장애인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나에게는 척추와 골반을 연결하는 뼈인 천골(엉치뼈)이 없었다.” 의학 용어로 ‘천골무형성증(Sacral Agenesis)’입니다. 존스는 “어떤 것이 생성되지 않았거나 생성에 실패했다는 뜻”의 그리스어 ‘agenesis’를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에게 없는 천골, 나의 누락된 요소.”

저자 클로이 쿠퍼 존스. (C)Andrew Grossardt. 한겨레출판사 제공
“골목길의 이상한 물체였다”

이 ‘누락’은 삶에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길에 나가면 낯선 사람이 빤히 쳐다보기 일쑤죠. “(사람들은) 나를 걸어 다니는 비극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여행지에 가면 자신을 세워두고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도 나옵니다. “나는 작았고, 난쟁이였고, 그건 웃기고 기막힌 일이었다. 나는 진짜가 아니었다. 그냥 골목길의 이상한 물체였다.”

10대 시절 어떤 아저씨는 존스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너에게는 우아함이라고는 없구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대학원 지원 때 정체성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넣지 않았지만, 동기 하나는 소수자 비율 의무규정이라는 요행 덕에 존스가 합격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적 공간만의 일이 아닙니다. 어른이 된 뒤에는 “추상적인 장소 중에도 내가 속하지 않는 곳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섹스, 연애, 동반자 관계…. 이것들은 모두 장애가 있는 여성이 입장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구역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말하거나, 내 친구들이 어떤 연예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낼 때 내가 끼어들면 움찔했다. 아무도 내가 데이트를 하거나 결혼을 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혐오를 드러내는 이도 나타납니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 대학의 동료 교수 하나는 취중에 “임신한 여자들은 모두 의무적으로 장애 검사를 받게 하고, 만약 장애가 발견되면 강제로 낙태를 시켜야 한다”는 말까지 합니다. 청각장애인 부부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이런 말을 우생학적인 말을 한 겁니다.

청각장애인 부부가 배아 단계의 청각장애 아이를 선택해 키우면서 문화, 언어, 삶을 아이와 공유하기를 원한다면? 즉 “청각장애 아이의 배아만을 선택해서 자궁에 이식하는 것은 윤리 원칙에 위배될까?” 존스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매 학기 이 사례를 수업에서 다룹니다. 학생들은 열띤 토론을 벌이죠. 찬반 와중에 분명한 건 학생들이 ‘청각장애인을 온전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동료는 말할 것도 없죠.

존재를 교묘하게 부정하는, 선의의 말들

친구나 가족이 좋은 의도로 하는 말도 상처가 되곤 했습니다.

내가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를 쉽게 이야기하는 비장애인들에게는. 그들은 내가 그런 일들을 ‘그냥 무시해야 한다’거나, ‘그 정도는 웃어넘길 줄 알아야 한다’거나, 내가 ‘너무 예민하다’거나, ‘큰일은 아니네’라거나, ‘그건 큰일이네, 정말 큰일이야’라면서 내가 지금보다 더 화를 내야 하는데 ‘왜 그렇게 담담해?’라고 묻는다. 보통은 좋은 의도로, 나를 더 용감하게 만들어주려고 하거나 내가 불편한 상황을 잘 이겨내도록 하려는 의도로 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항상 정반대 효과를 발휘한다. 나는 야단 맞는 기분이 들거나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이 든다. 절대로 경험하지 않을 사람에게 그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존재를 교묘하게 부정당하는 느낌이 든다.
배제의 도끼들

존스는 ‘배제의 도끼’란 표현을 씁니다. 곳곳에서 이 도끼를 휘두르는 상황에서 존스는 누구와도 삶을 공유하지 않으려 합니다.

나는 누구와도 내 삶을 공유하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내 몸을 보지도 않고 응시하는 것도 잊어버리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면 그렇게도 됐다. 내가 타인에게 충분히 노출되면 나의 장애도 무뎌졌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내 장애를 잊어버리기까지 각기 다른 양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나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존스는 “나는 거리를 두고 존재하는 것, 나의 중심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나의 본성”이라고 믿게 됩니다. ‘임신’과‘모성’은 또 다른 배제의 영역이었습니다.

“생명을 키우기에 부적합니다.”
나는 평생 동안 내가 임신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뇌는 입력된 사실들을 받아들이고 그 사실들을 토대로 현실을 형성한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현실이 진실이라고 믿었고, 그게 아니라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 나에게 절대적인 진실이었다. 열일곱살 때 나에게 첫 남자친구가 생기자, 엄마는 나의 임신 가능성을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어떤 검사를 시켰다. 의사는 나의 장애로 인해 내 몸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엄마가 “잉태할 수 없다”는 그의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더니 의사는 이렇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생명을 키우기에 부적합하다’라고 하면 어떨까요?”

존스도 자신을 “생명을 키우기에 부적합”하다고 여깁니다. “그 결과 내 상상력의 어떤 부분, 나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는 게 어떤 걸까를 궁금해하는 부분은 전혀 발달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임신한 뒤에는 “임신해도 되는 거예요?” “어떤 아이를 낳게 되는데요?” 같은 자신을 아이에게 위험 요소로 여기는 질문을 받게 됩니다. 산부인과 의사는 “이게 도덕적으로 맞나요? 당신과 똑같은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겠어요?”라고 말합니다.

‘중립의 방’으로 도피하다

‘배제의 도끼’를 막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들을 고안합니다. 편견, 오해, 공격, 동정에 부딪힐 때면 자신을 ‘중립의 방’에 놓습니다. 두 남자 동료가 술집에서 존스를 가운데 두고 ‘불행한 출생’이란 주제를 두고 입씨름을 벌일 때도 그랬습니다.

나 자신을 ‘중립의 방’에 놓는다. 중립의 방이란 내가 어렸을 적에 육체적 통증으로부터 분리되기 위해 만들어낸 마음속 공간이다. 중립의 방에는 문도 창문도 없고 흰 벽만 있다. 그 벽에는 한 번에 하나씩 회색 숫자들이 나타난다.
1, 2, 3, 4, 5, 6, 7, 8. 1, 2, 3, 4, 5, 6, 7, 8.
수를 세다 보면 다른 것은 모두 희미해진다. 모든 것이 무가 되고, 무뎌져야 할 것이 무뎌지는 텅 빈 곳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그곳에서는 세상이 흐릿해지고, 술집은 더 어두워지고 더 시끄러워진다. 콜린의 얼굴과 목소리도 희미해지고, 그의 말들은 나에게 힘없이 와 닿았다가 흩어져서, 술집 안의 끽끽대고 삐걱대는 소리와 거리의 소음에 섞여버린다. 윙윙거리는 소리는 계속되고, 검은 소음은 긴 밤을 더 검게 만든다.
육체로부터 정신을 분리하기

‘철학하기’는 ‘도끼’에 대비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철학이 인간 본성과 인간의 정신과 우주의 커다란 수수께끼들에 관해 뭔가를 느끼게 해줘서 좋았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나의 진짜 일은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닦는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천천히, 심각하게 글을 읽도록 나를 훈련시켰다.”

존스가 스승으로 삼은 철학자는 고대 그리스의 플로티노스입니다. “(가족, 나이, 고향 같은) 실체적 현실을 인간에게 해로운 잡념으로 취급”한 철학자입니다. 이 철학자는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육체 안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누적된 오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존스는 “기꺼이 육체로부터 정신을 분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영원한 아름다움이 기다린다”는 말을 믿으려 합니다. “이성과 지혜와 조화를 달성”한 ‘소프로시네’ 상태에 이르려 합니다. 소프로시네를 획득하려면 “육체의 자극, 고통과 쾌락을 모두 차단”해야 한다고 플로티노스는 말합니다. “그렇게 정화된 영혼은 육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지적인 이데아와 이성이다. 오직 이 신성한 질서에서만 아름다움의 원천과 온갖 종류의 아름다움이 생겨난다.” 존스가 또 좋아한 철학자는 흄입니다. “아름다움은 외적 속성들의 집합이 아니라 깊이 사색하는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흄의 이론을 선호했습니다.

플라톤 이론을 비틀어 ‘배제의 도끼’를 막는 방패를 만들다

즉 존스는 남들과 섞이지 않고, 홀로 있으며 자신의 완전한 존재를 발견하려 합니다. 플라톤에게서도 도끼를 막는 ‘방패’를 만듭니다.

배제를 당할 때는 나도 수치심을 느꼈다. 나 혼자만 특이한 형벌을 받고 있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형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나의 수치심에는 독선적인 미움이라는 감정이 쌍둥이처럼 따라다녔다. 나를 진짜 사람으로 보지 않고, 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나를 실생활과 조금 떨어진 곳에 두는 것을 편안해하는 비장애인들이 미웠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사람들을 여러 계급으로 나누는데, 그중 가장 높은 계급은 철학자 계급이다. 철학자들이 고귀한 존재인 이유는 그들이 경험과 진리의 차이를 밝혀내는 것과 같은 쓸모없는 일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렌즈를 통해 보면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는 것을 영광의 표지로 재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플라톤의 이론을 비틀어서 방패 모양으로 변형했다. 세상에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나를 더 훌륭하고 더 현명한 철학자로 만들어주고, 내 영혼은 금으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은 철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이론들은 우월의식을 내포하고 있었고, 내가 그 우월의식을 받아들이고 나니 나는 더 이상 아래로 추락하지 않고 높이 떠 있을 수 있었다. 삐딱한 태도는 절망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가 됐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세상과 거리를 두고 존재해아 한다면 위에서 내려다보는 쪽이 낫겠지.’

존스는 종종 “더 현실적인 삶, 사방에서 반짝이는 삶, 밝고 충만하고 접근 불가능한 삶의 흐름에서 밀려나기 전에 나만의 고독한 장소로 대피”합니다. “(비극적인) 빛 속에 들어가 있을 때면 내가 그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낍니다. “경험을 추상화해서 이론으로 만들며 우월감”을 느끼는 일은 존스에게 익숙한 방어 기제였습니다.

빛 속에 들어가는 일은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단절시키는 홈을 더 깊게” 파는 것이기도 하죠.

비욘세 2009년 콘서트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비욘세 콘서트에서 단절과 고립, 어둠에서 벗어나다

단절과 고립, 어둠에서 벗어나 자신을 드러내기로 한 계기는 ‘비욘세 콘서트’에서 비롯됩니다. 출석 문제로 다툼을 벌인 제자 한 명이 나중에 사과하러 와서는 “그때 제가 화가 났던 건 얼마 전에 비욘세를 보고 왔기 때문이었어요”라고 말합니다. 이 제자는 콘서트에 다녀온 뒤 가창 수업을 신청합니다. 자녀가 그날 사고를 치면서 가창 수업은 못 받게 됩니다.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놓친 것 같아 겁이 난 제자가 존스에게 출석 문제를 두고 화를 낸 것입니다. 이 제자는 비욘세 콘서트를 꼭 보라며 추천합니다.

여기서 ‘이지 뷰티’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에게 익숙한 방어 기제는 ‘탈취(take over)’였다. 즉 그 경험을 추상화해서 이론으로 만들며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취향으로 보나 지적인 면으로 보나 대중가요 콘서트는 내 수준에 맞지 않는 경험이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다. 다수 대중에게 매력적인 그런 경험은 틀림없이 뭔가를 결여하고 있을 것이라고. 그냥 손쉬운 쾌락이거나,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보샌켓이 말한 ‘쉬운 아름다움(easy beaty)’일 거라고.
쉬운 아름다움은 눈에 잘 띄고 편안하다. 단순한 곡조, 단순한 공간적 리듬… 장미, 젊은이의 얼굴, 전성기를 맞이한 사람의 육체. 이 모든 것은 단조롭고 직설적인 기쁨을 준다.
비욘세의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능력’

보려 해도 비욘세의 뉴욕 콘서트는 끝이 난 상태였습니다. 남편이 생일 선물로 밀라노 공연 표를 끊어주면서 이탈리아로 떠납니다. 존스는 이 콘서트에서 비욘세의 다양한 힘들을 낍니다.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안에,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능력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그녀의 몸의 분자 하나하나가 모두 그 순간의 우리에게 맞춰져 우리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오직 우리에게만 자기 자신을 내줬고, 우리도 우리 자신을 그녀에게 내줬다. 그녀가 노래할 때 우리는 한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녀가 움직이면 우리도 따라 움직였다. 우리는 하나의 유기체였다. 우리는 사람들의 바다였다. 그녀가 오른쪽으로 가면 우리도 오른쪽으로 갔다. 그녀가 왼쪽으로 가면 우리도 왼쪽으로 갔다. 그녀를 볼 수 없을 때면 우리는 실망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무대 가장자리로 나와 우리와 가까워지면, 우리는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리고, 그녀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몸을 앞으로 뻗었다. 우리가 손을 흔들면 그녀도 답례로 손을 흔들었다. 모든 사람이 발뒤꿈치를 들고 서서, 두 팔을 뻗고, 손을 펴고, 그녀에게 더 가까워지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8만 명의 사람들 가운데 내가 그녀와 가장 가까이 있었다 다음 두시간 동안 그녀는 자기의 모든 것을 정말로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녀는 현재의 절대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상태에 진입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잠깐이지만 그녀처럼, 순간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안에 존재했다.

존스는 이 콘서트에서 “사람들의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직설적이고 자신만만한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있었다. 내가 이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며 나 자신을 거의 설득했던 온갖 방법이 생각났다. 그동안 나는 여러 겹의 우월의식, 이론, 핑계를 사용해서 자존심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그 안에만 안전하게 머물렀다. 구경꾼이었던 나 자신의 나약함이 부끄러웠다. 열린 공간에 나가 앉아, 냉혹한 사실들과 복잡성과 긴장된 감정들을 직면하지 않으려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방어적인 태도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 게 또 뭐가 있을까?
시간과 인내, 집중을 요구하는 ‘어려운 아름다움’

‘이지 뷰티’의 반대말 ‘어려운 아름다움(difficult beauty)’입니다. ‘시간과 인내와 더 많은 집중을 요구’하는 겁니다.

어려운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능력은 우리가 받은 교육, 우리의 안목, 인내,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에 달려 있다. 어려운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복잡함’과 ‘긴장’, 그리고 ‘폭넓음’을 만난다. 미학적으로 어려운 대상은 복잡하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 대상의 복잡한 요소들을 분해하고 분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내면에서 혐오와 증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 어려운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감정이 팽팽하게 긴장된’ 상태에 머물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어려운 아름다움의 도전 앞에서 위축되는 원인은 우리 자신의 나약함이다. 보샌켓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려와서 그것을 ‘구경꾼의 나약함’이라고 부른다. ‘팽팽하게 긴장된 감정을 인내하고 즐기는 능력은 보기 드문 편이다.’

존스는 비욘세 콘서트에서 다시 ‘어려운 아름다움’ 의미를 생각합니다. 존스가 지향하는 바를 집중한다면 책 제목은 ‘어려운 아름다움’이 맞을 듯도 합니다.

보샌켓의 말에 따르면 어려운 아름다움은 ‘한 순간에 복합적인 것들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걸 전부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진정으로 복잡한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감상하려면 그것을 천천히, 조금씩 소화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 아름다움이 한꺼번에 자기 자신을 뚜렷하게 드러내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콘서트에서 아들 울프강이 태어날 때 느낀 복합적이면서 섬세한 감정들을 떠올립니다.

나는 울프강의 몸이 내 가슴을 누르는 걸 느꼈다. 내 팔로 울프강을 안을 때의 정확한 무게를 느꼈다. 울프강과 앤드류(남편)가 바닥에 앉아 블록 놀이를 하고 있을 때 내가 문간에 서 있었던 그날 저녁이, 우리 사이의 틈이 기억났다. 앤드류와 울프강은 현재에 있었고 나는 나의 과거에 있었다. 이제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방법을 모를 뿐. 나에게 그럴 능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장애학, 철학, 미학에다 여행기, 예술비평

영화제와 테니스 경기 등 현장을 다녀야 하는 잡지사 기자로 일합니다. 자기 장애를 직시하며 써낸 게 이 책입니다. 책은 기본적으로 자서전이자 회고록입니다. 존스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삶의 무시무시한 평범함에 압박을 느끼고, 더 많은 것, 더 아름다운 어떤 것을 갈구”하던 아빠, “항상 장애를 나에게 유리하게, 또는 적어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로 바라본 엄마 이야기가 나오죠.

장애학, 철학, 미학에다 여행기, 예술비평을 종횡무진으로 오갑니다. 베르디부터 앨리슨 래퍼까지 여러 예술가와 작품에 관한 깊이와 재미를 아우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존스의 다른 글은 ‘미국 최고의 여행 기사’와 ‘미국 최고의 스포츠 기사’로도 뽑히기도 했습니다. <이지 뷰티> 중 킬링필드의 다크 투어리즘에 관한 이야기와 테니스 경기에 관한 글을 보면 수상 이유를 알게 됩니다.

당신이 ‘엘프’에 요정으로 나왔을 때 아이들이 진짜로 열광했답니다

<왕좌의 게임> 티리온 라니스터 역을 맡은 피터 딘클리지와 선댄스 영화제에서 만나면서 벌어진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나를 알아봤고, 내가 그의 심정을 안다고 생각했다. 내 몸에 전율이 일었다. 플로티노스가 말했던 ‘동질감’. 어떤 영혼이 다른 영혼에게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짜릿한 느낌. 플로티노스는 그걸 ‘아름다움’이라 불렀다. ‘동질감’이라. 나와 피터 딘클리지가? 아니, 안 된다. 마음을 가라앉혀야 한다. 그가 유명인이어서 나에게 실제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나는 그를 모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고, 그의 생각과 감정을 직관적으로 알 수도 없다는 걸 잊지 말자. 우리는 똑같지 않고 우리의 몸은 똑같지 않다. 우리의 정신세계는 다르다. 우리의 병력, 연령, 젠더, 직업, 과세 등 급은 다르다. 그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고, 유명한 사람이 되면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느낌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나는 모른다. 그는 오직 그에게만 속하고, 나와 비슷하지 않고, 다르다. 우리는 똑같지 않다. 이 모두가 중요한 진실이다.
영화 <엘프>에서 동화 작가 핀치(피터 딘클리지 분)가 자신을 자꾸 엘프라고 부르는 버디(윌 페럴 분)에게 달려가는 장면.

딘클리지가 먼저 존스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 한 사람이 끼어들어 “우리 아이들이 <왕좌의 게임>에서 당신을 정말 좋아한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라고 말합니다. 이까지는 괜찮았죠. 이어지는 말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런데 있잖아요. 당신이 <엘프>에서 요정으로 나왔을 때 우리 아이들은 진짜로 열광했답니다.” 딘클리지가 맡은 역할을 크리스마스 요정 엘프가 아니라 동화 작가 핀치입니다. 이 영화에서 버디(윌 페럴 분)가 핀치가 북극의 엘프인 줄 알고 자꾸 ‘엘프’로 부르다가 핀치의 화를 부르는 장면이 나옵니다. 끼어든 사람은 이런 말도 합니다. “꼬마 요정이 꼬마 요정 역할을 하는 게 뭐가 문젠데요? 난쟁이가 꼬마 요정 역할을 하는 거요. 그 사람을 난쟁이라고 해도 되는 건가요?”

책은 퓰리처상 전기·자서전 부문 최종 후보까지 올랐습니다. 비장애인도 ‘배제의 도끼’에 당하곤 합니다. 삶을 살아내야 한다면, 공감할 대목이 많습니다.

책 추천사는 주례사일 때가 많습니다. 김원영(변호사)의 추천엔 공감하게 됩니다. “장애여성이자 철학자, 한 아이의 엄마인 클로이는 아름다움도 삶도 고통도 철학적으로 관조하던 인물이었지만, 이 책이 담고 있는 여행과 만남들을 통과하며 삶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고, 마침내 자기 자신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을 들어 올려 세상을 향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과정을 따라가는 일은 문학적 체험이면서 여행이었고, 매우 신체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경험이었다.”

김원영이 2018년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사계절)을 냈을 때 서평을 썼습니다.


☞ [책과 삶]‘잘못된 삶’이라는 혐오 너머 ‘존엄의 순환’
     https://m.khan.co.kr/culture/book/article/201806222026015

지난 9월에 쓴 <좋은 엄마 학교>(허블) 저자 제서민 챈이 존스의 이 책을 추천했습니다. 구글을 검색하니 두 사람이 만나기도 했네요.


☞ ‘엄마’에게만 ‘모성’을 강요하는 학교가 있다면?…‘좋은 엄마 학교’[플랫]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9261515011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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