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 스타트업 성장 배양토로서의 대기업 역할
필자가 몸담고 있는 앤톡에서는 '성공경로분석 (Victory Road)'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기업 발굴 모형을 개발하고 있다. 이는 성공한 벤처기업들의 초기 사업여정과 주요 활동 기록들을 분석해 공통적인 성장 패턴과 핵심 성공요인을 도출한다. 주요 기업들의 현재 모습이 아닌 극초기 시절을 벤치마킹함으로써, 초기 기업이 생존기를 넘어 고속 성장을 이루는 비결을 과거로부터 추출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산업별 성장 인자와 주요 이정표를 정의하고, 이와 가장 유사한 경로에 있는 현재의 유망 스타트업들을 데이터 기반으로 식별한다.
최근 앤톡은 금융기관과 기술검증 (Proof of Concept) 프로젝트를 진행해 본 모형을 적용한 반도체 산업의 성장인자 (Growth DNA) 추출과 혁신기업 발굴과 관련된 실험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를 위한 기초 작업으로 이미 성공궤도에 안착한 국내 반도체 자동화 장비 및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의 과거 데이터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지난 20년 동안의 방대한 연혁, 활동, 보도자료를 빅데이터를 통해 검토한 결과 다양한 성공 공식이 수면 위로 드러났고, 그중에 한 가지 시사점이 유독 눈에 띈다.
성공한 국내 반도체 장비 및 부품 기업 대부분의 초기 사업화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진행됐다는 점이다. 일반적 창업은 기술 개발과 제품 출시가 시간을 두고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반면, 벤치마킹 대상 반도체 기업들은 설립 첫해부터 동시다발적으로 기술과 제품 개발, 그리고 매출까지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많은 경우 설립 후 3년 내에 해외 수출까지 완료해 다각적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이러한 병렬적 사업화와 시장 연착륙이 가능했던 이유는 국내 반도체 대기업과의 유기적인 상생 네트워크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사업 초기부터 반도체 대기업과 협력업체로 관계를 형성해 안정적 수익원을 마련하고 자생적 사업모델을 확립함으로써 스타트업 데스밸리를 무난하게 넘어가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국내 대기업과의 계약 체결은 단순 납품 관계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의 훌륭한 레퍼런스로 작용한다. 이는 반도체 창업 기업들이 조기에 해외 시장으로 자연스럽게 진출할 수 있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국내 반도체 창업생태계가 확장되고 성공 사례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대기업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대기업과의 연계를 통한 스타트업의 성장과 창업생태계 확장은 특정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산업 전반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CVC (기업형벤처캐피탈) 투자, 오픈이노베이션 기반의 제휴, 그리고 사내벤처를 통한 분사 등 스타트업과 대기업을 잇는 채널이 다변화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다. 창업기업은 이를 통해 자금 조달과 대외 신뢰도를 확보할 수 있고, 대기업은 업무 효율화와 신규시장 개척의 포석을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생관계가 바람직한 형태로 정립되기 위해서는 상호신뢰가 기반이 돼야 하고, 대기업은 이를 단순한 사업 기회로만 여겨서는 안된다. 뉴스를 통해 심심치 않게 접하는 대기업들의 스타트업 기술 도용, 유출, 탈취 소식은 생태계 전체의 협력과 성장을 가로막는 방해요인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적 안전 장치와 스타트업 내부 기술보호 노력 또한 수반돼야 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대기업 스스로가 자신이 창업생태계의 적극적 육성 주체라는 인식이 필요하며 이에 따른 사회적 책임도 인지해야 한다.
우리는 무심코 창업생태계 육성과 활성화 주체를 정부와 공공기관으로 한정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생태계 육성 이해관계자로서 민간기업들을 배제하는 무의식적 프레임워크다. 그동안 수 많은 창업기업들이 대기업과의 협력과 상생을 통해 성장했고 대기업이 직간접적인 배양토 역할을 수행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다 건강하고 사회적 책임이 깃든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협력 창구가 확대되길 바라며, 이를 통해 스타트업의 성장과 글로벌 진출의 가속화가 이루어지길 희망한다.
[머니투데이 스타트업 미디어 플랫폼 유니콘팩토리]
박재준 앤톡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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