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가? 투자가?…故 이건희 회장이 미술품 사들인 진짜 이유는 [방영덕의 디테일]
한 시가 급했습니다. 이 그림도 보여주고 싶고, 저 작품도 보여주고 싶고, ‘인증샷’ 찍기에도 바빴습니다. 9박 10일 한정된 시간에 아홉살 아이와 단 둘이 간 유럽 박물관 미술관 투어였거든요. 휘모리 장단에 맞춘 듯 박물관을 아이와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머리를 ‘띵’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국립미술관 ‘내셔널갤러리’의 한 전시관에서였습니다. 작품 앞에 편하게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아이와 이를 가만히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의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감정을 조금은 날려보낼 수 있었던 것은 국내로 돌아와 ‘이건희 컬렉션’을 보고 나서였습니다.
지난 2021년 삼성전자 이건희 선대회장의 유족은 이 선대회장이 평생 수집한 작품 2만3000여점을 국가기관에 기증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불리는 이 작품들에는 ‘인왕제색도’와 같은 국보 14점, ‘추성부도’ 등 보물 46점이 포함돼 그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덕분에 늘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우리의 문화 예술적 유산이 한층 풍부해졌습니다. 많은 이들이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요. 특히 그러한 여유를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경험함으로써 문화 경쟁력 역시 자연스럽게 쌓을 수 있게 됐습니다.
신학·인문학 분야 권위자인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학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이 선대회장은 기업가가 우리 사회를 위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보여줬다”고 평가하기도 했는데요. 25일 이 선대회장 추모 3주기를 맞아 그의 미술품 기증에 대해 재조명해보았습니다.
지난 18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한국경영학회 주최로 열린 ‘이건희 회장 3주기 추모·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김상근 연세대 신학대학교수는 이같이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 선대회장이 작품을 기부한 행위는 단순하게 과시나 재산에 관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어떠한) 의도를 갖고 국가에 기부를 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 선대회장은 이중섭 작품에서 투자 가치가 있는 일반 그림 외에 세계적으로 공인되지 않은 예술 장르인 은지화까지 일괄 구매해 기부를 했는데, 이는 이중섭이란 작가가 한국 미술사에 미치는 영향력을 박물관적 지식으로 나누고 싶어한 이 선대회장의 의도 때문이라는 게 김 교수의 해석입니다.
또 1점당 30억~40억원이나 되는 고(故) 김환기 작가의 작품을 1000점 넘게 사들여 기부한 것 그의 행보에 대해 김 교수는 “한국 미술의 위대함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 이를 하나의 레퍼토리로 남기겠다는 철두철미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 선대회장은 생전에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이 정말 한국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때 문화적인 경쟁력이 생긴다”라며, 우리의 문화와 예술이 삶 속에 자연히 스며들기를 바라왔는데요.
실제로 최근까지 200만명 가까운 관람객들이 전국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이건희 컬렉션의 국보급 문화재와 세계적 미술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이 선대회장의 바람대로 그가 평생 수집해 온 2만3000여점의 미술품의 국가 기증을 통해 우리 국민들 의 문화 향유권이 높아진 것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수집행위 자체가 대를 이어 1대로부터 2대 혹은 3대까지 이어지기란 사실 쉬운 일은 아닌데요. 돈이 있다고 다 되는 일도 아니고, 정성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닌 게 바로 수집이기 때문입니다.
수집 스타일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달랐습니다.
1976년 호암미술관 설립과 함께 특별채용돼 1995년까지 부관장 등을 역임하며 삼성가 2대의 수집을 도운 이종선씨에 따르면 이병철 창업회장은 비싸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누가 뭐래도 구입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반면 이 선대회장은 값을 따지지 않고, 별로 묻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좋다’라는 전문가의 확인만 있으면 별말 없이 미술품 구입을 하는 편이었습니다.
이 선대회장은 또 명품 한 점이 다른 많은 수집품의 가치를 올려준다는 지론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친의 수집을 보면서 그만의 독자적인 수집력을 쌓은 이 선대회장은 결국 호암과는 다른 차원의 ‘리움 컬렉션’, ‘이건희 컬렉션’을 완성하게 됐습니다.
김 교수는 “이 선대회장은 직원에게 국보를 사라고 주문한 당시, 한국 사람이 경매에 참여하면 양보하고, 외국인이 나오면 절대로 물러서지 말라고 했다”며 “나라를 위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미술계에서는 이 2라운드를 통해 여러 지역 미술관들의 시설 개선과 전시 차별화 노력 등의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건희 컬렉션 전시를 통해 지역 국공립 박물관과 미술관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됐다는 지역 관람객들도 많고요. 그만큼 우리 문화 예술을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게 된 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해외 미술관에서도 이건희 컬렉션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합니다.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건희 컬렉션 중 국보 ‘인왕제색도’를 포함한 250여점은 오는 2025년 11월부터 2026년 1월까지 미국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에서 전시될 예정입니다. 역대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미국 시카고미술관과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도 2026년 차례로 전시될 예정인 한편, 미국 뉴욕을 대표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이건희 컬렉션과 맞교환해 전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같은 교류 전시가 성사될 경우 우리 국민들은 미국을 방문하지 않고도 세계 3대 박물관의 전시품을 감상할 기회를 얻게 되는 셈입니다.
아이와는 아직 이건희 컬렉션을 함께 보지 못했습니다. 아이에게 빨리 빨리를 외쳤던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된 작품 수가 2300여개입니다. 그런데 그 10배에 달하는 2만3000여점의 미술품을 한 개인이 국가기관에 기증을 했습니다. 압도적인 규모죠.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느리게, 여유롭게 전시회를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건희 컬렉션이 준 뜻밖의 효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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