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1천600점 기증 국문학 원로 "노벨문학상 다가서는 일"
"후학 활용하길"…문예지 편집주간 활동 '현역'…"한국문학·작가 사랑해야"
(서울=연합뉴스) 계승현 기자 = "저는 공부하던 흔적들을 여기에 떼어놓은 셈이고, 이게 앞으로 공부하는 후학들에게도 귀한 자료로 활용될 테니까 기분이 정말 좋아요."
국문학계 권위자이자 원로 문학평론가인 권영민(75)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직접 발로 뛰며 수집한 문헌 등 1천654점을 모교에 기증한 소회를 밝히며 "아주 날아갈 듯하고, 정말 감격스럽다"며 환하게 웃었다.
연합뉴스는 지난 25일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권영민 문고 설치 기념전 '어느 국문학자의 보물찾기'에 참석한 권 교수를 만났다. 정갈한 남색 정장 차림에 코르사주를 단,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 원로 교수는 후학 양성의 중요성을 언급할 때마다 눈을 반짝였다.
그는 가난한 대학생 시절부터 청계천 고서점 골목을 발로 뛰며 구한 이광수의 '무정' 5판본(1924), 염상섭의 '만세전' 초판본(1924), 정지용의 '백록담' 초판본(1941) 등 국내 문학 거장들의 초기 판본과 가문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온 고문헌을 학문 후속세대의 연구를 위해 선뜻 내놨다.
서울대에 기증한 계기를 묻자 권 교수는 모교가 학부생, 대학원생 시절 공부하고 32년간 교수로 재직한 곳인 만큼 애정을 가진 공간인 점을 강조했다. 그는 "대학원생으로 조교 일을 할 때 이삿짐을 나르면서 관악캠퍼스를 시작한 사람이니까 감회가 깊다"고 했다.
서울대 국문과가 속했던 옛 문리대는 1975년 서울대 종합화 계획에 따라 인문과학대·사회과학대·자연과학대로 분리되면서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현재의 관악캠퍼스로 이전했다.
비싼 책을 내놓은 것이 아깝지 않으냐는 질문에 "책을 사 모으는 데 큰돈을 들인 건 아니지만 가치가 높은 건 사실"이라면서도 "실물 책을 보면서 삐뚤빼뚤한 활자에서 오는 감동을 느껴야 하는데, 요즘 문학 연구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상황이 늘 안타까웠다"고 답했다.
그는 시종일관 후학 지원의 관점에서 원전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권 교수는 "출판사들이 작가 사후에 원본의 표현·표기법을 고치며 개정하기 때문에 시중 책들을 보면 '원본에서 이렇게 표시했을까' 의문을 갖게 만드는 표현이 많다"며 "그게 또 그 뒤로 어떻게 변했는지, 왜 그렇게 변했는지를 정확히 밝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후 판본이나 개정판은 작품의 완결성, 완성도가 높다는 장점이 있지만 원본 고유의 가치와 특장점을 무시할 수 없다는 취지다. 여전한 노학자의 연구 열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천재 작가' 이상 연구의 전문가인 권 교수 자신도 이상의 초기 일본어 작품을 정확히 파악하고 오역을 바로잡기 위해 일본을 여러 차례 오가고 자문을 구하는 등 원전에 대한 철저한 연구로 알려져 있다. 권위 있는 문예지인 '문학사상'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하면서 문학계의 최신 흐름과 새로운 작품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현역'이기도 하다.
권 교수는 직접 모은 북한 관련 문학 자료 90점도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했다. '문학신문'은 창간호부터 1960년 12월 27일까지 보존한 국내 유일의 자료다.
권 교수는 "88올림픽을 개최하면서 한국 정부가 월북 작가들에 대해 해금 조치를 했고, 당시 이홍구 통일원 장관이 내게 특수문서 취급 허가증을 발급해주며 북한 자료를 모아달라고 했다"며 "그 허가증을 갖고 일본, 홍콩, 연변 등을 돌며 있는대로 북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 문헌 연구가 남한과 북한을 하나의 문학 사조 속에서 설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라며 "언제까지나 남과 북이 이렇게 (분단돼) 있지는 않을 텐데, 그때를 대비해서 문학 연구의 단절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국문학 문헌 보존에 대해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문헌을 중시하고 잘 관리해야 외국인들이 '아, 이 사람들은 현재 활동하는 작가들에 대해서도 귀중하게 생각하겠구나'라고 여기며 우리 문학을 다시 들여다볼 것"이라고 짚었다.
또 "번역을 잘하는 건 아주 세부적이고 실천적인 항목에 불과하다"며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이 한국 작가의 작품을 사랑하고 작가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그러면서 "우리가 우리 문학을 스스로 중요시하고 가치를 인정해주고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해외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작가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이고, 그래야 국제 무대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않겠나"라고 강조했다.
ke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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