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에 걸린 저널리스트의 이야기 [비장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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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 누군가의 침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이터널 메모리〉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기억이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며 혼란스러워 합니다. 기억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고 진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과거에 매여 있기 위해서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억하는 겁니다. 우리의 문제와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관대하게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기억의 재구성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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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마이테 알베르디
출연:아우구스토 공고라, 파울리나 우루티아
어느 밤 누군가의 침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이터널 메모리〉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자신을 깨우는 여성에게 남자가 묻고 있다. “난 아우구스토 공고라예요. 당신은 누군가요? 우리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죠?”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하는 여자. “만나서 반가워요. 난 파울리나예요. 내가 깜짝 놀라게 해줄게요.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서예요. 당신이 기억할 수 있게요. 아우구스토 공고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어지는 장면에서 관객은 청년 아우구스토가 기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이크를 들고 거리로 나가 수많은 사람을 인터뷰하는 영상을 본다. 그리고 머지않아 관객이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장면. 책 한 권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아까 침실에서 그를 깨우던 여성이 첫 장을 넘겨 거기 적힌 글을 읽는다.
“파울리나. 내가 6년 동안 쓴 책이야. 내게 아주 소중한 책이라 당신에게 주고 싶어. 여기엔 고통이 있어. 공포를 고발하고 있지. 하지만 고귀함도 가득해. 여전히 금지된 기억이지만 이 책은 고집스러워. 기억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 당신처럼 씨를 뿌리는 사람들. 당신은 기억하고 용기가 있고 씨를 뿌리는 사람이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아우구스토로부터.”
잊힐까 봐 두려웠다. 수많은 이들이 끌려가고 고문당하고 살해당한 역사가 잊히는 것, 그게 가장 두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기록에 매달렸다. 피노체트 군사독재 정권의 악행을 끈질기게 취재한 책 〈칠레, 금지된 기억〉을 펴내며, 1989년의 아우구스토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억이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며 혼란스러워 합니다. 기억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고 진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과거에 매여 있기 위해서 기억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억하는 겁니다. 우리의 문제와 약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관대하게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 기억의 재구성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모든 게 ‘잊힐까 봐’ 두려웠던 청년 저널리스트는 이제, 모든 걸 ‘잊을까 봐’ 두려워하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었다. 기억이 사라져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매며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20년 넘게 함께 사는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에게 매일 아침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파울리나. 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거 알아요? 이 방 말이에요. 여긴 우리 방이에요. 우린 부부거든요.”
그렇게 매일매일 씨를 뿌리는 이야기다. 그 씨앗이 내 마음 속에 든든한 나무로 뿌리내리는 85분이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데 계속 미소까지 짓게 만드는 마지막 장면은 내가 뽑은 ‘올해 가장 아름다운 엔딩’이다. 흔한 투병기를 예상했다가 너무도 귀한 사랑이야기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다큐멘터리. ‘결국 기억을 잃고 마는 상실감’ 대신 ‘끝내 사랑을 잊지 않는 고귀함’이 한가득 담긴 작품. 이 영화는 놓치면 안 된다. 다른 영화 보는 건 까먹어도 이 영화 챙겨 보는 건 까먹으면 안 된다. 정말. 진심이다.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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