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45] 소년은 분노에 사로 잡혀 광장을 바라봤습니다. 연인의 죽음을 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형을 주도한 자는 소년의 아버지. 한 나라의 왕이었던 부친은 이 관계를 처음부터 극렬히 반대했지요. 아들이 뜻을 꺾지 않자, 결국 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습니다.
아들의 연인을 공개 처형하기로 결정합니다. 사지를 찢는 극형에 처하려다가, 자비를 베풀겠다며 참수형을 강행했지요. 아들은 울부짖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제발 살려만 달라고 애원도 해봤지요. 무용지물이었습니다. 엄한 아버지이자, 한 나라의 왕이었던 그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덜컹.’
사랑하는 연인의 목이 광장으로 떨어졌습니다. 소년은 창에서 눈을 돌려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복수를 맹세했지요. 이 나라의 왕이 되어서 아버지보다 훌륭한 왕이 되겠다고요.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요.
아버지에게도 사정은 있었습니다. 왕위 계승자인 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남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아들은 동성애자였습니다. 친구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점점 진해지면서 결단을 내려야했었지요. 아버지로서, 왕으로서, 나라의 위엄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독일 역사에서 ‘대왕’ 칭호가 붙은 유일한 인물입니다. 동성애자로서 위대한 통일 독일의 기틀을 다진 복합적 캐릭터지요. 그의 삶을 사유하는 시간입니다.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집안에 태어난 ‘예술적 아이’
프리드리히는 독일 지방에서 새로운 강자로 떠 오른 왕국 프로이센의 왕자였습니다. 빌헬름 1세와 왕비 소피아 도로테아의 삼남으로 1712년 태어났지요. 왕실이 그토록 바라 온 아들이었습니다. 왕세자인 첫째와 둘째가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그를 군인으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이제 갓 탄생한 프로이센 왕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뛰어난 ‘군인왕’이 필요하다고 그는 여겼지요. 아침마다 정원에서 대포를 쏘아 어린 나이에 프리드리히를 깨우곤 했습니다. 6살부터는 ‘어린이 군대’에 입대해 생도로서 훈련을 받을 정도였지요.
왕세자 프리드리히의 천성은 그러나 아버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음악과 철학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문화가 꽃 피우는 프랑스 문화도 동경하게 됩니다. ‘남성성’과 ‘무력’만을 강조하는 프로이센의 문화를 그는 경멸했습니다. 영국 왕실 출신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어머니 소피아의 영향도 한 몫을 했지요.
아들의 성적 취향…불화의 씨앗이 되다
아버지 빌헬름 1세는 아들이 썩 못마땅했습니다. 어머니 치마폭에서 여성적인 것만 배워가고 있다고 생각했지요. 프로이센의 지도자가 되기엔 썩 적당하지 않은 인물로 보였습니다. 아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와 정반대처럼 살고 싶었고, 빌헬름 1세는 반항하는 그를 체벌과 모욕으로 다뤘습니다. 부자(父子) 관계에는 실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1730년, 프리드리히가 18살이 됐을 무렵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궁전에서 들린 한 소문이 원인이었지요. “왕세자가 8살 연상의 귀족 한스 헤르만 폰 카테와 성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지요.
빌헬름 1세의 시름은 깊어져 갔습니다. 유약한 성격인 건 알고 있었지만, 동성애까지는 생각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왕세자인 프리드리히가 카테와 함께 영국 망명까지 계획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요.
아들의 연인을 죽인 비정한 아버지
“저 놈을 죽여버리게. 왕세자가 보는 앞에서.”
빌헬름 1세는 카테를 참수하는 극약 처방을 내립니다. 왕세자는 방에 감금했습니다. 그 창문을 통해서는 처형 장면이 훤히 보였지요. 빌헬름 1세는 신하들을 시켜 그가 똑똑히 참수 장면을 지켜보게 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창문을 열고 프랑스어로 이렇게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사랑하는 카테 님, 제발 저를 용서해주세요. 신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세요.”(Veuillez pardonner mon cher Katte, au nom de Dieu, pardonne-moi!)
죽음을 앞둔 카테의 화답도 눈물겹습니다. “제가 용서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위해 기쁨으로 죽겠습니다.” 그의 목이 이내 광장의 차디찬 바닥에 떨어집니다. 프리드리히는 감금된 방안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만 흘렸었지요.
억지 결혼...그리고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그가 수도인 베를린에 돌아올 수 있었던 건 2년이 지나서였습니다. 복권에는 조건이 따라붙었습니다.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의 딸 엘리자베스 크리스틴과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여자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던 왕세자를 위한 고육책.
이성에 도통 관심이 없던 프리드리히일지라도, 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지요. 언제까지 죄인으로 감옥에서 썩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1733년 6월의 일이었습니다.
억지로 붙여 놓은 두 사람 사이에 불이 붙을 리가 없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첫날 밤 크리스틴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한 시간 후에 그는 방을 나왔지요. 남은 밤, 그는 궁 밖을 돌아다니면서 사색에 젖었습니다. 그가 꿈꾸던 사랑이 궁전 안에는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두 사람은 46년의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사랑은 없었습니다. 물론 그 결과물인 아이도 없었지요.
7년 후 프로이센은 근심에 빠집니다. 왕의 건강은 나빴고, 왕세자의 평판은 최악이었습니다. 남색자인 프리드리히가 만들어갈 프로이센의 앞날은 비참해 보였지요.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합니다. “군대를 소유한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소유한 군대”라고 불리던 프로이센의 경쟁력은 약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모두가 불안했던 동성애 왕의 반전
“왕이 떠나셨다.” 아버지 빌헬름 1세가 사망합니다. 1740년 프리드리히가 왕관을 쓰게 됩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습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에 완벽한 군주로서 역할을 하기 시작합니다. 군국주의의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계몽주의를 결합하면서였습니다. 아버지를 넘어서 전장에선 용맹하고 지혜로웠습니다. 손색없는 군인왕이었지요. 국가를 운영하는 데 있어서도 뛰어난 정치력을 보였습니다.
그의 군사적 역량이 첫 시험대에 오른 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었습니다. 이웃 나라이자 초강대국인 오스트리아의 새 왕으로 여자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지목되면서 문제가 불거지지요. 여자가 오스트리아의 왕좌에 오를 수 없다는 명목이었지만, 유럽의 패권을 쥐려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던 사건이었지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권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전쟁에 나섰습니다.
나폴레옹의 존경도 받은 프리드리히
오스트리아 슐레지엔 지역을 7주만에 점령합니다. 여러 차례 전쟁이 오갔지만 승자는 프리드리히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2만여명 군대로 4만여명의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합니다. 적군 1만명이 죽어 나가는 동안 그의 군대에서 사상자는 550명에 불과했습니다.
1745년 12월 25일, 드레스덴 조약이 체결됩니다. 오스트리아가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 넘겨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지요. 이때부터였습니다. 프리드리히의 이름에 ‘대왕’이라는 칭호가 붙었던 것은요.
프리드리히는 세간의 우려를 완벽히 불식시켰습니다. 그보다 유능한 군 사령관은 없었을 정도였지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서 프로이센은 승리를 거뒀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지역적 이점을 이용해 반전을 이뤄냈지요. 프로이센은 명실공히 독일을 넘어서 유럽의 최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후대 프랑스의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리드리히가 살아있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할 정도였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전쟁 역사학자 로베르토 시티노는 말합니다. “프리드리히는 역사상 가장 공격적인 야전 사령관이었으며 끊임없이 가능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이었다.”
프로이센의 전성기를 이끌다
“통치자는 제1의 심부름꾼”
민주주의 국가를 설명하는 첫 번째 명제입니다. 이를 천명한 이가 바로 프리드리히 대왕이었습니다. “군주는 냉혹하고 현실주의자여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을 정면 반박하는 내용이었지요. 실제로 그는 ‘반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굶주림이 가장 큰 정치적 위기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농작물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운하 건설에 나선 배경이었지요. 당시 독일 지역에서는 생소하던 감자와 순무를 들인 것도 그였습니다. 그가 때때로 감자왕(Der Kartoffelkonig)이라고 불린 이유입니다.
성적 지향만큼이나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종교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발탁하는 용병술도 탁월했지요.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와의 친분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두 사람은 50년 동안 서신을 교환했을 정도였지요.
완벽한 왕...동성애 성향은 여전했다
‘왕’으로서 프리드리히는 완벽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은 여전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궁전 중 하나인 ‘상수시(Sanssouci)’로 가보시지요. ‘근심이 없다’는 뜻처럼 그는 이곳에서 국정의 괴로움을 모두 잊고 방탕한 성생활을 즐겼습니다.
수 많은 미남들이 이곳에서 프리드리히의 기쁨을 위해 헌신했지요. 평화로운 나날, 매일같이 게이파티가 열렸습니다. 궁전 정원에는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를 그린 조각들이 여럿 있었고, 소년의 누드 조각상도 가득했지요. 명백하게 이곳은 ‘금녀’의 구역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함께 머물면서 프리드리히와 지적 유희를 나눈 이는 볼테르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프리드리히를 ‘LUC’라고 표현합니다. 거꾸로 읽으면 CUL, 불어로 엉덩이라는 뜻이지요. 그의 동성애적 취향을 우회적으로 조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프로이센의 시민들은 그를 추앙합니다.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존재였기 때문이지요. 그는 살아있는 신이자, 프로이센 그 자체였습니다.
죽어서도 끊임없이 이용당한 프리드리히
위대한 왕은 고독해져갔습니다. 절친한 동성 친구들도 이제 거의 떠났고,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은 없다시피했습니다. 시민들의 환호성도 그에게 위로가 되어주진 못했지요. 그에게 남은 건 애완용 강아지 그레이 하운드 뿐이었습니다. 그는 유언으로 ‘그레이 하운드 옆에 묻어달라’고 했을 정도였지요.
1786년 8월 17일. 프리드리히가 눈을 감았습니다. 프로이센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의 죽음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뒤 약 100년 뒤, 독일은 마침내 통일을 이뤘습니다. 프로이센의 주도 아래 이뤄진 성과였지요. 당시 프로이센 수도인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로 발돋움합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역사상 명군은 소환되기 마련입니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한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였지요. 그는 프리드리히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습니다.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히틀러를 현대판 프리드리히로 선전할 정도였으니까요.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습니다. 히틀러가 역사상 가장 지독한 동성애 혐오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스실로 밀어 넣은 건, 유대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 많은 동성애자들이 학살을 당해야 했지요. 프리드리히가 만약 나치 시절에 살았다면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가 프리드리히를 독일의 아이콘으로 내세울 때, 이 사실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는 꽤 자주 권력자들에 의해 편집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복잡성을 사유하는 사색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지도자로서 자질이 없다는 명제를 프리드리히가 완벽히 반증합니다. 히틀러의 생각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네줄 요약>
ㅇ프리드리히 대왕은 독일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주다.
ㅇ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프로이센을 대국으로 만들었다.
ㅇ동시에 그는 동성애자였다. 왕비와 잠자리를 하지 않아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ㅇ히틀러는 지독한 동성애 혐오자임에도, 프리드리히를 자신의 롤모델로 내세웠다.
<참고문헌>
ㅇ김장수, 독일 통합의 비전을 제시한 프리드리히2세, 푸른사상,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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