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와 어원이 같은 이것, 강력한 창조의 무기가 되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이번 연필은 너무 짧아서 주머니 안감에 휘감기거나 구석에 끼어 버립니다.”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주문했던 연필이 마음에 안들자 직접 이글연필사(Eagle Pencil Company)에 항의 편지를 보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 재빨리 윗주머니에서 연필을 꺼내 메모를 해야하는데 연필이 한번에 안잡힌 것이다.
에디슨은 연필광이었다. 그것도 굳이 몽당 연필만 쓰는 매니아였다. 1000여자루의 연필을 한번에 주문하기도 했다. 길이는 정확히 3인치(7.6cm)로 셔츠의 왼쪽 앞주머니에 들어가 끝이 살짝 나오는 정도여야 했다. 그래야 생각이 떠오를 때 생각을 낚아채듯 연필을 낚아채 기록할 수 있었다. 심도 진하고 부드럽고 무른 것을 좋아했다. 그래야 빨리 또렷하게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필’의 발명은 쓰기 혁명을 가져 왔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오래 전부터 ‘필기구’가 있었다. 동양에는 먹을 묻혀 쓰는 붓이 있었고 서양에는 잉크로 쓰는 펜이 있었다. 하지만 붓이나 펜이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몸에 휴대하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연필은 이런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줬다.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언제든지 필요할 때 적을 수 있었다.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을 적을 수 있었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쓸 수 있었다.
‘칠판과 분필’이 가르치는 사람의 도구가 됐다면(‘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5-칠판과 분필’편 참조 https://www.mk.co.kr/news/it/10844854 ) 연필은 배우는 사람의 도구가 됐다. 누구나 쉽게 쓰고 쉽게 기록할 수 있게 되니 지식의 습득과 축적의 속도가 빨라졌다. 휘발성이 강한 아이디어를 붙잡을 수 있게 되니 인간의 창의력이 폭발했다. 쉽게 쓰고 쉽게 지우고 다시 쓸 수 있게 되니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연필은 인류의 문명에 기여했다.
어느날 강한 돌풍이 불어서 커다란 물푸레나무가 뿌리채 뽑혀졌는데 그 아래에서 검게 빛나는 물체가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양치기가 양떼를 몰던 중 검은 퇴적물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등산가가 산에 오르다 나무 뿌리에 붙어 있는 검은 가루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보로데일 광산에서 처음 양질의 흑연이 대량으로 채굴됐고 17세기까지 유럽 전역으로 수출됐다는 사실이다.
흑연을 사용하면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쓸 때 편리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599년 이탈리아 자연사학자 페란테 임페란티(Ferrante Imperanti)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림을 그릴 때 흑연은 펜과 잉크보다 훨씬 편하다. 표시가 흰 바탕 위에서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고유한 광택 덕분에 검은 바탕 위에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흑연 표시는 오래 보존할 수 있고 쉽게 지울 수 있으며, 먼저 흑연으로 그린 다음 펜으로 되짚어 가며 따라 그릴 수도 있다.”
물론 당시에는 흑연심을 나무 사이에 끼우는 오늘날의 연필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흑연을 쥐기 편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시도됐다. 광산에서 막 채굴한 투박한 흑연 조각을 양가죽에 싸서 쓰기도 하고 길쭉한 막대 형태의 흑연을 끈이나 종이로 감아서 쓰거나 갈대에 끼워 쓰기도 했다.
이런 형태의 연필이 널리 사용됐다. 1610년 런던 거리에서 흑연을 파는 것은 오늘날 문방구에서 연필을 파는 것 만큼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예술가들과 기록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흑연의 형태가 달랐다. 예술가들은 흑연을 나무로 만든 케이스에 넣어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고 현장에서 기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줄로 감거나 밀짚에 끼워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에는 아직 고무가 발견되기 전이어서 빵 조각을 지우개로 사용했다. 1612년 한 저술가는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하는 습관이 있다면서 이렇게 썼다. “흑연으로 메모하면 수시로 고쳐가며 쓸 수 있다. 막 구운 빵 조각으로도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연필, pencil의 어원이 바로 penis인 셈이다. 둘다 창조의 도구라는 측면에서는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연필광이기도 한 세계적인 공학자 헨리 페트로스키는 <연필>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연필’의 어원을 연구하다 보면 시대착오적이고 외설적이며 성차별적인 해석이 더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이 연필 조상의 프로이트적 요소보다 기능적 요소에 주목하면 훨씬 더 흥미진진해진다. 인공물의 이름은 확실히 상징적이고 잠재적인 의식에서 비롯되는 경향이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펜슬을 연필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따지면 사실 이것도 잘못된 용어다. 연필의 연은 ‘납 연(鉛)’자를 쓰는데 사실 연필심으로 쓰이는 흑연과 납은 전혀 다른 광물이기 때문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영어나 독일어를 번역하면서 이렇게 쓰였을텐데 독일어로 연필은 Bleistift로 ‘납 막대기’라는 뜻이고 영어에서도 연필심은 lead, 즉 납이라고 불렀다.
흑연이 처음 발견되던 당시의 화학적 지식으로 사람들은 이 물질이 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흑연은 연필의 재료로 쓰이기도 했지만 포탄을 주조하는 거품집 안쪽에 바르는 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전쟁으로 인해서 흑연이 전략물자가 된 것이다. 당시 영국은 프랑스의 혁명 사상이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을 통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영국은 프랑스를 겨냥해서 대륙봉쇄령을 내렸다. 당연히 전략물자로 인식되던 흑연의 수출도 통제됐다.
프랑스는 연필심으로 사용할 흑연이 부족했다. 영국이나 독일로부터의 연필심 수입이 끊겨 고생하던 프랑스 혁명 정부의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 전쟁 장관은 당시 에콜 폴리테크니크 교장이었던 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에게 연필심 개발을 의뢰했다. 그때 몽주가 추천한 인물리 바로 예술가이자 엔지니어인 니콜라스 콩테(Nicholas Jacques Conté, 1755~1805년)였다. 콩테는 프랑스군의 이집트 공격 때 하늘에 기구를 띄우는 기술적 재능을 보여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때 영국이나 독일에서 수입된 천연 흑연을 사용하다 자주 부러지는 경험을 했던 콩테 스스로도 연필심의 성능을 개선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여러차례 실험을 했으나 실패를 거듭하던 콩테는 탁자에 놓여있던 도자기 접시에서 힌트를 얻었다. “도자기처럼 흙이랑 섞어서 구워보면 어떨까?” 흑연가루를 흙과 섞어 막대기 모양으로 구워보았다. 정말로 잘 부러지지 않는 연필심이 탄생했다. 이때가 1795년이었다.
더구나 흑연과 흙의 배합 비율과 굽는 온도에 따라 강도와 색깔의 농도까지 조절이 가능했고 무엇보다 더 이상 순도 높은 영국산 흑연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말하자면 영국의 대륙봉쇄령이 프랑스의 연필 독립의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콩테의 연필은 현대 연필의 표준이 됐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연필에 대해 썼다. 그 연필이 바로 ‘파버 카스텔(Faber-Castell)’ 연필이다.
‘파버 카스텔’은 파버 가문에서 먼저 시작됐다. 1760년 독일 슈타인 지역에서 가구 제작자였던 카스파어 파버가 나무 다루는 기술을 살려서 연필 제조업을 시작했다. 1784년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은 안톤 빌헬름 파버(Anton Wihelm Faber)는 콩테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여기에 ‘A.W.Faber’라는 상표를 붙인다. 창업자 때부터 이어져오는 나무 다루는 기술과 콩테의 연필심 만드는 방법이 결합하니 최고의 연필이 되었다.
파버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사람은 1839년 회사를 물려받는 4대 회장 로타 폰 파버였다. 로타는 연필심을 B(Black, 짙기)와 H(Hard, 강도)에 따라 18단계로 세분화했다. 또 1843년 미국에 진출해 뉴욕에 첫 번째 해외 지사를 설립했다. 반 고흐가 극찬한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흑연심’을 만들기 위해 시베리아의 흑연 광산에서 원자재를 개발하기도 했다.
1898년에 파버 가문의 오틸리에 폰 파버(로타르의 손녀)와 독일의 귀족가문 출신 알렉산더 카스텔 뤼덴하우젠(Alexander Castell-Rudenhausen)이 혼인하면서 이때부터 두 가문의 이름을 따 회사 이름을 ‘파버 카스텔(Faber-Castell)’로 바꿨다. 파버 가문의 사위였던 알렉산더는 파버 카스텔의 6대 회장이기도 한데, 1905년 지금까지도 파버카스텔의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카스텔9000’을 내놨다. 당시 모든 연필은 원형으로 만들어졌으나 굴러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육각형 연필’ 디자인을 고안하기도 했다.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1733~1804)는 1770년 고무를 사용하면 빵을 사용할 때보다 더 깨끗하게 연필글씨를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때부터 지우개는 연필의 단짝이 됐다.
미국의 저명한 출판 기획자 존 브록만은 세계의 석학들에게 “지난 2000년간 발명된 것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때 미디어 이론가 더글라스 러시코프는 “지우개”라고 답했다. “수정 용액처럼 과거로 돌아가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것들이 없었더라면 과학과 사회, 문화와 윤리의 발전도 없었으리라는 것”이 그 이유다. “지우개는 단순히 종이로부터 흑연 가루를 털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중요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온 도구”라는 것이다.
연필 끝에 지우개를 처음 단 사람은 미국의 하이멘 립먼(Hymen Lipman)이었다. 자메이카 출신의 봉투 판매업자 겸 발명가, 화가 지망생이었던 그는 41세인 1867년 3월30일 특허를 따냈다. 립먼은 취득 4년 뒤 특허권을 다른 사업자에게 10만 달러에 넘겼다.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1875년 립먼의 특허권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렸다. ‘립먼이 받은 특허권은 새로운 발명이 아니라 기존의 제품인 연필과 지우개의 단순한 결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특허권이 해제되자 다른 업체들이 너도나도 고무 지우개 달린 연필을 생산하는 바람에 이것이 곧 연필의 표준이 되었다.
얼마전 작고한 이어령 선생은 <지우개 달린 연필>이라는 책에서 “(지우개 달린 연필은)‘쓰기와 지우기’라는 상반된 행위의 결합”이라며 “쓰고, 잠시 중단해 지우고 다시 쓰는 과정의 반복을 통해 새로운 사고가 싹틀 수 있다. 지우개를 머리에 단 연필이야말로 창조적 사고의 샘물”이라고 했다.
지난 2018년 <연필로 쓰기>라는 제목의 산문집까지 내놨는데 그 책 서문에서 김훈은 연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자신이 왜 아직 글을 쓸 때 연필을 고집하는지에 대해서도 밝혔다.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은 나에게 소중하다. 나는 이 느낌이 없으면 한 줄도 쓰지 못한다.”
김훈은 자신의 이름이 한자로 찍힌 전용 원고지에 독일제 스테들러 연필로 꾹꾹 눌러 쓴다.
글을 쓰는 작가들 중에는 연필 애호가들이 많다. 김훈이 스테들러 연필로만 쓰듯 이들은 대부분 한가지 브랜드의 연필로 글을 썼다.
<분노의 포도>의 작가 존 스타인벡은 에버하드 파버가 1934년에 내놓은 ’블랙윙 602‘로만 썼다. 블랙윙 602를 처음 만난 순간을 스타인벡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후 스타인벡의 모든 작품은 이 연필로 쓰여졌다. 한번에 블랙윙 602를 수십 더즌씩 사놓고 작품 집필에 들어갔다. 날마다 여섯 시간씩은 연필을 쥐고 소설 초고를 썼다. 자신이 연필을 손에 쥘 수 있는 ’조건화된 손을 가진 조건화된 동물‘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을 품었다. 그러니까 1962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블랙윙 602가 있어서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퀸시 존스나 레너드 번스타인 같은 유명 인사도 블랙윙 602와 사랑에 빠졌고, <롤리타>의 작 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역시 이 연필을 고집했다. 나보코프의 마지막 소설 ‘할리퀸을 보라’의 마지막 문장이 이랬다. “난 네가 부드럽게 만지작거리던 블랙윙 연필의 각진 면을 쓰다듬었다.”
또 한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토니 모리슨도 연필 애호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처음에는 무조건 연필로 써요”라고 말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작가 로알드 달은 매일 아침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 6자루를 뾰족하게 깎은 후에야 집필을 시작했고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도 시나리오를 쓸 땐 딕슨 타이콘데로가를 꺼내들었다.
역사적 인물 중에 연필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숲 속의 현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다. <월든>과 <시민의 불복종>을 쓴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그는 연필을 만드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그는 가업을 물려받아 1844년 당시 세계 어디 내놓아도 손색 없는 질 좋은 연필을 직접 개발하고 판매했다. 하지만 1853년에는 연필사업에서 손을 떼고 숲으로 들어갔다. 연필에서 숲으로, 아무튼 그는 평생 나무와 함께 살았다.
‘읽고 쓰기’가 지능 발달과 학습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는 유대인의 역사가 증명한다. 유대인들이 과학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는 이유에 대한 갖가지 주장이 있지만 그 중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유대인들은 2000년전부터 모든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 교육을 시켜왔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2세기 말 유대인 사회에서는 ‘모든 유대인 아버지는 6~7세의 아들이 히브리 토라를 읽고 공부할 수 있도록 초등교육기관에 보내라’는 내용의 유대교 법령이 선포됐다. 독실한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토라를 읽고 공부하고 자신의 아이들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학교에 보내는 것과 동일시된 것이다. 유대인 공동체에서는 초등교육기관은 물론 무료 중등교육기관 설립이 장려됐다.
다른 민족들보다 1600년이나 앞서 유대인들은 보통 의무교육을 실시했고 그 중심에는 ‘읽고 쓰기’가 있었다.
이런 종교적 의무 때문에 유대인 집단은 거의 전체가 문해력을 갖추게 됐고, 상업이나 무역 금융업 등 전문직업의 세계 뿐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는 기본 바탕이 됐다.
유럽 사회는 유대인들이 해왔던 모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교육과 ‘읽기 쓰기’ 교육을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시작했다. 이때 아이들이 쓰기를 위해 집어든 것이 연필이었다. 쓰기가 학습을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 경험으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입증됐다.
카린 제임스 미국 인디애나대 교수팀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손으로 직접 글을 쓸 때와 쓰지 않을 때를 비교해 손글씨를 쓰면 이미지를 형상화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성장기 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아이들이 손으로 직접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와 어른이 읽기ㆍ쓰기를 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똑같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2011년 앤 망겐 노르웨이 스타방에르대 교수팀도 손글씨를 쓰기 위해 펜과 종이를 만지며 움직이는 신체적 행위 자체가 글씨 하나하나를 인지하는 지각 능력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19세기 과학기술의 발전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보통교육이 의무화되면서 사람들의 문해력과 지성이 높아진 결과였다. 교육의 중심에는 읽기와 쓰기, 수학과 과학이 있었고 가장 중요한 학습도구는 연필이었다.
연필의 중요성은 역설적으로 디지털기기가 증명해주고 있다. 태블릿PC, 스마트폰 등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학교 수업이 확산되고 아이들이 손에 연필 대신 스마트폰을 쥐게 되면서 읽기 능력 등 기초 학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 스웨덴은 유치원에서 디지털 기기 사용을 의무화(2017년)했던 기존 방침을 전면 백지화하기로 했다. 스웨덴 교육부는 나아가 6세 미만에 대한 디지털 기기 활용 교육을 완전히 중단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태블릿PC 등 사용을 멈추는 대신 종이에 글을 쓰는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캐나다 온타리오주(州)는 새 학년을 맞은 이달부터 ‘필기체 쓰기’ 수업을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필수 교육과정으로 되살리기로 했다.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가 단어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도록 돕는다는 학계 의견을 받아들인 조치다. 필기체 쓰기 수업은 2006년 선택 과목으로 강등됐다가 17년 만에 제자리를 찾게 됐다. 온타리오주 교육 당국은 “필기체 쓰기 수업은 자기 이름을 서명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이상의 의미가 있다”며 “필기가 더 실질적이고 진정성 있게 표현하고, 더 비판적으로 사고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삶의 기술이라는 사실이 연구 결과로도 분명히 나타났다”고 밝혔다.
어디 글뿐이겠는가. 뾰족하게 깎은 연필 끝에서 참으로 많은 것들이 탄생했다. 에펠탑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설계도도 그 끝에서 시작했고, 피카소와 반 고흐의 명작들 역시 연필 끝에서 흘러나왔다. 연필은 인류 최고의 학습 도구이자 창작 도구였다.
이 졸고도 책을 읽고 연필로 끄적여 두었던 메모에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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