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의 신’이 직접 비법 전수한 이곳…맛도 세계최고라는데 [전형민의 와인프릭]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천계 12신 중 가장 수식어가 많은 신은 누굴까요? 바로 디오니소스(바쿠스)입니다. 디메토르(어머니가 둘인 자)부터 트리고노스(세 번 태어난 자), 폴리고노스(거듭 태어난 자), 브로미오스(소란스러운 자), 리아에우스(근심을 덜어주는 자), 니세우스(니사에서 자라난 자), 이아쿠스(부르짖는 자), 바쿠스(부르짖는 자), 자그레우스(위대한 사냥꾼)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죠.
이 모든 별칭보다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신화에 따르면 인간에게 와인을 양조하는 법을 알려준 신이기 때문입니다. 제우스의 사생아였던 그는 제우스의 부인인 헤라의 눈을 피해 니사 산에서 살던 어린 시절, 스승인 실레노스(현자이자 물의 요정)에게 포도주를 양조하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가 신으로서 권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후엔, 자신이 배운 양조법을 활용해 이집트와 리비아, 시리아와 포이니키아, 프리기아와 아나톨리아, 그리고 먼 인도까지 모험하며 인간들에게 술과 축제를 전파했습니다. 인간이 신을 지칭하는 별칭, 수식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과 친근하다는 방증이겠죠. 아마 디오니소스는 이 덕분에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신으로 남게된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와인 양조법을 직접 전수한 곳, 그리스 동쪽 끝 사모스(Samos)의 와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디오니소스는 어느 날 고대 인도를 정벌하고, 인도 코끼리 등 진귀한 물건과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회군합니다. 돌아오던 중 에베소, 현재의 튀르키예 이즈미르주(州) 에베소(에페소스·Ephesus)에 당도하는데요. 여기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고, 전설 속 여전사들인 아마존이 살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호전적인 아마존들과 디오니소스가 맞붙으면서 발생합니다. 둘 사이 전쟁이 벌어집니다만, 아무리 전설의 여전사더라도 신인 디오니소스를 당해내지 못하죠. 결국 아마존들은 에베소에서 서쪽 1마일(1.6㎞) 떨어진 사모스 섬으로 도망가고, 디오니소스가 이들을 쫓아 사모스섬에 상륙합니다.
이때 사모스인들은 디오니소스를 도와 아마존들을 소탕했는데, 전쟁이 끝나고 디오니소스는 이를 고맙게 여겨 사모스인들에게 와인 양조법을 직접 전수해줬습니다. 디오니소스를 술의 신이자 포도주의 기원으로 여기는 서양 신화대로라면, 사모스야말로 원조에게 기술을 직접 전수받은 맛집인 셈입니다.
실제로 사모스의 특정 지역에서는 거대한 코끼리 뼈가 출토됐습니다. 섬에 코끼리가 자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 데려왔지만 결국 죽어 묻힌 것으로 짐작됐죠. 현대의 시각으로보면 선후가 뒤바뀐 얘기겠습니다만, 그리스인들이 여기에 디오니소스 신화의 살을 붙인 게 아닐까요.(과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 뼈는 800만년 전 마스토돈의 흔적으로 밝혀졌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친숙한 농법이 나옵니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계단식 농법과 흡사한 중간 중간 돌을 쌓아 축대를 세워 밭의 높낮이를 구분하는 방식입니다. 사모스인들은 이를 테라스식 포도원(terraced winery)이라고 부르는데, 가파른 고도 속에서도 어떻게든 포도나무를 심고 키우려는 의지가 돋보입니다.
신화 속 역사 때문일까요? 사모스인들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 역시 대단한데요. 자생 품종만 4000여종에 달해 ‘포도 품종의 쥬라기 공원’으로 불리는 그리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섬 대부분이 모스카토(Moscato) 단 한 가지 품종으로 와인을 만들어 왔습니다.
재밌는 것은, 이런 극한의 기후가 사모스의 디저트 와인을 세계 최고 중 하나의 반열에 올려놨다는 점 입니다. 비잔틴 시대인 서기 741년 예루살렘을 여행하던 중 사모스를 방문한 여행 성직자 빌리발트(Willibald)에 의해 중부와 서부 유럽에 알려졌는데요.
특징적인 단 맛과 매력적인 향 덕분에 오랜 기간 동안 가톨릭 교회의 성찬례에 쓰이는 포도주로 사용되면서 큰 명성을 얻습니다. 중서부 유럽에서는 기후적으로 이렇게 달고 진한 화이트와인을 생산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와인러버라면 이미 한번쯤은 드셔보셨을만한 뱅두(Vin Doux)는 포도 열매를 압착 후 주정강화 과정을 거친 와인입니다. 노란색에 가까운 황금빛을 띄고 알코올 도수는 최소 15% 이상입니다. 달지만 복합적이지 않은, 직관적이고 깔끔한 맛이 매력적입니다.
뱅두보다 상급으로 분류하는 사모스 안테미스(Anthemis)는 또 다른 매력을 발휘합니다. 늦수확(late harvest)한 포도로 만든 와인을 5년 간 오크통에서 숙성해 황금색을 넘어 연한 갈색을 띄고요.
색에 비해 오크향이 강하지 않은 게 인상적입니다. 다른 곳보다 큰 오크통(650ℓ)을 사용했기 때문인데요. 안테미스에서는 약간의 커피 원두와 훈연 풍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브랜디 같은 뉘앙스를 보입니다.
색과 향에 비해 입에서는 상당한 산미와 가벼운 풍미를 보여주기 때문에 부담없이 자꾸 홀짝거리게 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가히 신들의 음료라는 이름을 붙일만 합니다.
“헤파이스토스여, 이 와인은 신들의 음료 넥타르보다 맛있답니다. 암브로시아에 곁들여 한잔 들이키세요. 많이 마실수록 행복해진답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헤파이스토스로부터 헤라를 구해내기 위해 자신이 만든 와인을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는 헤파이스토스가 맛있는 와인에 빠진 사이 붙들려있던 헤라를 구출해내죠.
헤파이스토스가 비록 한쪽 다리를 절긴 했지만 그래도 신인데, 도대체 디오니소스가 만든 와인은 얼마나 맛있었던걸까요. 사모스 넥타르를 통해 그 와인의 맛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쉐리를 제외한 대부분 디저트 와인은 달달한 맛을 자랑하는데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티라미수 같은 달콤한 디저트과 함께하면 단맛이 더욱 부각돼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혹시 소테른이나 포트와인처럼 이미 친숙한 디저트 와인이 질리시나요? 신들의 음료에 가장 근접했다는 사모스 디저트 와인에 도전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45년된 아파트 130억에 팝니다…평당 1억6천 찍은 ‘이 단지’ - 매일경제
- “여보, 국민연금 연 2400만원 나온대요”…올해 첫 20년가입자 월평균 100만원 - 매일경제
- 전청조 사기무대 된 시그니엘…단기임대 많고 아파트 아닌 ‘오피스텔’ - 매일경제
- 中·日 가이드는 노는데 韓 가이드는 “바쁘다, 바빠”라는 이 나라 - 매일경제
- “죽으면 썩을 몸, 한 번 줘라”…산악회 중년들의 저질 문화, 실화냐 - 매일경제
- “내가 죄 지었나, 너희 맘대로 징계해 놓고”…홍준표, 사면 논의에 발끈 - 매일경제
- “한 번 자는 데 얼마예요?”…10대女 집앞까지 따라간 스토킹男 - 매일경제
- 돈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이것’만 있으면 가능하다는데 [Books] - 매일경제
- 사과만 4번...‘마약 혐의’ 이선균, 경찰 출석 “고통 감내하는 가족에 미안” - 매일경제
- 살라 제치고 홀란드 추격, 8호골+10G 무패 이끈 ‘쏘니’ 최고 평점까지 겹경사 [EPL]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