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 '사우디 프로젝트'에 담긴 포석

정재웅 2023. 10. 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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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인더스토리]
정의선 회장, 47년전 정주영 명예회장 개척시장서 신사업
자동차·에너지·플랜트 등 역량 집중…중동시장 확장 노려
/그래픽=비즈워치
워치인더스토리는 매주 토요일, 한 주간 있었던 기업들의 주요 이슈를 깊고, 쉽고, 재미있게 파헤쳐 보는 코너입니다. 인더스트리(산업)에 스토리(이야기)를 입혀 해당 이슈 뒤에 감춰진 이야기들과 기업들의 속내를 살펴봅니다. [편집자]

할아버지가 개척한 시장

우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공기를 여섯 달이나 단축하겠다는 현대건설의 제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6년 2월 사우디아라비아 체신부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사이자 '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불리는 주베일 산업항 건설 최종 입찰자로 현대건설을 선택했습니다. 1970년대 중동 지역의 대형 공사들은 모두 선진국 건설사들이 독차지해왔던 터라, 존재감이 미미했던 한국의 현대건설 수주에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1975년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시작으로 사우디에 첫발을 내디딘 당시 현대그룹은 1년 뒤 주베일 산업항 수주를 따내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은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실 80년대 중동 신화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내에는 중동 붐이 불었고 우리나라는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했던 사람이 바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입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 첫번째)이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 / 사진=현대차그룹

정 명예회장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 금액으로 9억6000만달러를 써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 예산의 4분의 1규모였습니다. 주베일 산업항의 예정 입찰가는 12억달러였습니다. 예상가보다 20% 이상 낮은 가격을 써낸 겁니다. 선진국 건설사들과 정면 승부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낮은 가격을 앞세워 수주에 나섰고 이 전략은 성공을 거뒀습니다.

업계를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그 이후 입니다. 정 명예회장은 발주처와 약속한 날짜를 맞추기 위해 모든 철 구조물을 울산 조선소에서 제작, 주베일항 현장까지 해상으로 운송했습니다. 또 현지의 갖은 악조건 속에서도 정확한 시공으로 사우디 정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덕분에 현대건설은 이후 사우디에서만 232억달러(약 30조원)를 벌어들였습니다. 미래를 위한 과감한 포석이 빛을 발한 겁니다.

전방위로 뛰어들다

사우디는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나라입니다. 중동 지역의 중심 국가인데다, 사우디가 추진하고 있는 '네옴시티' 때문입니다. 예상 사업비만 5000억달러(약 540조원)에 달하는 초대형 사업입니다. 이에 따라 각국 정부들도 자국 기업들이 네옴시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에 나섰습니다.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기업인들이 사우디를 찾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현대차그룹도 사우디에서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최근 자동차는 물론 친환경 에너지, 첨단 플랜트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 투자 계획을 내놨고 대규모 수주도 따냈습니다. 주력 계열사인 현대차와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현대로템, 현대제철 등이 참여합니다. 그야말로 전방위로 사우디 프로젝트에 뛰어든 셈입니다.

/그래픽=비즈워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대차입니다. 현대차는 오는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사우디에 연산 5만대 규모의 생산 공장을 짓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중동 지역에는 생산 기지를 두지 않았던 현대차가 첫 거점으로 사우디를 꼽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우디는 중동 최대 자동차 시장입니다. 코로나19로 주춤했던 지난 2020년을 제외하고 꾸준히 시장규모가 커졌습니다.

코트라에 따르면 지난 2019년 44만대 규모였던 사우디 자동차 시장은 지난해 55만2205대로 성장했습니다. 시장조사기관 피치 솔루션(Fitch Solutions)은 사우디 자동차 시장 규모가 오는 2032년에는 75만대 수준에 육박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현대차는 올해 상반기 기준 사우디에서 토요타에 이어 점유율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번 생산 공장 건설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현지 시장을 공략할 계획입니다.

친환경 에너지·첨단 플랜트도 

이뿐만이 아닙니다. 현대차는 산유국인 사우디에 '수소 생태계'를 심을 계획입니다. 얼핏 보면 뜬금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우디 정부는 최근 석유 중심 경제 탈피를 선언했습니다. 유한 자원인 석유에만 의존하다가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는 판단입니다. 미래 에너지로 부상하고 있는 수소 생태계에 관심을 갖는 이유입니다.

이에 따라 현대차는 자신들이 보유한 수소 연료전지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사우디에 이식할 계획입니다. 현대차는 이미 2020년부터 중동지역에 수소전기차, 수소전기버스, 수소전기트럭 등을 공급해왔습니다. 사우디를 거점 삼아 중동지역에 현대차 기술이 표준화 되도록 수소 연료전지 시스템을 깔아두겠다는 생각입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왼쪽)이 이달 23일 사우디 서북부 타북주(州)에 조성 중인 네옴시티(NEOM CITY) 주거공간인 ‘더 라인(THE LINE)’ 구역 내 현대건설 지하터널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현대차그룹

중동 지역에서 이미 각종 플랜트 건설로 입지를 다진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은 수주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현대건설은 지난 6월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인 아람코가 진행하는 약 6조5000억원 규모의 초대형 석유화학 단지 설비 사업을 수주했습니다. 최근에는 현대건설과 현대엔지니어링이 약 3조1000억원 규모의 ‘사우디 자푸라 가스처리 시설 프로젝트 2단계’도 수주했습니다.

현대제철은 지난해 수주한 사우디 주아이마 유전의 천연가스 액체 공장 확장 공사 후판 공급을 올해 완료했습니다. 여기에 LNG 에너지 프로젝트 확대에 따라 신규 가스 수송용 강관 소재를 개발하는 등 중동 시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현대로템도 지난해 이집트 카이로 전동차 공급 사업 수주 경험을 바탕으로 수소 기반 친환경 철도차량 기술을 앞세워 사우디에서의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전략 따라가는 손자

전방위로 이뤄지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사우디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는 것은 정의선 회장입니다. 정 회장은 자동차뿐만 아니라 그룹이 영위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을 사우디와 주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생각입니다. 눈앞 이익보다 좀 더 멀리 보겠다는 전략입니다. 47년 전 할아버지인 정 명예회장이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할 때와 비슷한 전략입니다.

특히 자동차의 경우 단순히 중동에 첫 생산기지를 건설한다는 의미 이상의 의도가 있습니다. 현재 계획은 연산 5만대 규모의 반조립 제품 공장이지만, 장기적으로 이곳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계획입니다. 현대차는 글로벌 전기차 시장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 중입니다. 사우디를 거점 삼아 향후 열릴 중동 전기차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계산입니다.

/그래픽=비즈워치

플랜트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사우디의 주력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는데 집중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네옴시티 사업을 비롯 여타 중동 지역에서의 시공 경험과 브랜드 이미지를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렇게 되면 현대건설이나 현대엔지니어링은 물론 현대제철과 현대로템도 중동 시장에서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습니다.

결국 현대차그룹이 사우디 프로젝트에 전방위로 뛰어드는 것은 미래를 위한 포석인 셈입니다. 중동의 중심국인 사우디에 다양한 사업 거점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동 지역은 물론 아직 미개척지인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확장도 준비하고 있는 겁니다. 할아버지가 개척한 토대 위 손자가 신사업을 심어 새로운 성과를 내려 합니다. 현대차그룹의 사우디 프로젝트에 눈길이 가는 이유입니다. 

정재웅 (polipsycho@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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