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길이 9.5km 마포 바이닐 로드 가보니… [新 LP의 시대]
인디음악 성지인 홍대 중심으로 안착
음악에서 라이프스타일로 매장 확장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서울 마포 동교동 ‘김밥레코즈’부터 용강동 ‘잇츠팝’까지… 총 거리 9.5㎞, 이동시간 1시간 54분.
대한민국 인디 음악이 꽃 핀 홍대를 중심으로 한 마포엔 이른바 ‘바이닐 로드’가 있다. 이 길을 걷는 ‘레코드숍 투어’가 MZ(밀레니얼+Z)세대들의 새로운 놀이 문화다. 대단한 준비는 필요 없다. 다만 ‘편안한 신발’과 ‘단단한 각오’는 필수다.
‘인디 음악의 산실’인 김밥레코즈에서 출발. 이곳에서 2분 거리의 ‘LP도시(LP Dosi)’에 들러 1970~80년대를 풍미한 J-팝을 듣는다. 곳곳에 숨어있는 방탄소년단(BTS)과 NCT의 굿즈를 발견하는 재미는 덤이다. 일본 음악이 ‘주인공’처럼 자리 잡은 이 곳엔 생전 처음 만나는 일본 가수가 부른 ‘광주 사태’ 음악은 물론, 40만원에 달하는 김광석의 음반도 만나게 된다.
LP도시를 나와 147m가량 걸으면 시간이 1970~80년대 어딘가로 멈춘 아기자기한 레코드숍 ‘피터판’이 등장한다. U2의 음악이 1만원대 LP부터 위탁받거나 일본에서 역수입’된 조용필·송창식의 LP가 진열돼 있다. 이곳은 특히 외국인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 20대 외국인 손님들이 와서 신중현, 김추자, 키브라더스 등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1970~80년대 한국 음악을 찾는다는 것이 피터판 관계자의 귀띔이다.
길을 거닐다 만나는 마포의 ‘큰 형님’ 격인 메타복스에선 20만 장에 달하는 압도적인 음반 규모에 놀랄지도 모른다.
메타복스까지 도달하면 사실 ‘레코드숍 투어’가 꽤나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동교동 ‘김밥레코즈’부터 시작한 1km 남짓의 거리에 레코드숍만 무려 6개에 달하기 때문이다. 거리는 짧지만 레코드숍이 구석구석 자리한 만큼 발품의 강도는 예상보다 고되다.
동교동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낸 뒤 연남동 방면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깔끔하게 정돈된 ‘사운즈굿’에서 재즈 감성을 만난 뒤, 합정동 ‘데이토나레코즈’에서 힙합 감성에 취한다. 이곳은 래퍼 더콰이엇과 염따가 설립한 LP 큐레이션 숍이다.
슬슬 다리가 뻐근할 때 즈음, 대흥동으로 발길을 돌리면 또 한 번 새로운 장르와 충돌한다. 록과 메탈의 성지인 도프레코드. 이곳에선 잠시 잊었던 ‘찐’ 하드록과 메탈을 만날 수 있다. 신수동의 방레코드에선 1960~70년대 클래식 록과 재즈 명반을 발굴할 수도 있다.
‘마지막 코스’는 ‘홍대 널판’이다. 이곳은 바이닐 로드의 초입에 있는 피터판과 121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투어의 마지막 목적지로 가는 게 더 낫다. 한쪽은 레코드숍, 다른 한쪽은 음악바이기 때문이다. 쩌렁쩌렁하게 음악이 울리는 바 한 켠에 마련된 LP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픈 시간도 저녁 6시다.
마포 일대엔 유독 LP 매장이 많다. 매장들이 동네 곳곳에 숨어있어 발품을 팔며 찾아가는 재미가 있다. 어떤 곳에선 ‘목욕탕 의자’에 앉아 미처 알지 못했던 가수의 명반을 발굴할 수도 있다. LP도시에서 만난 김정주(24) 씨는 “몇 년 전부터 바이닐에 빠졌는데 최근엔 동교동, 합정동 일대의 레코드숍에 디깅하러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며 “온라인에선 목적을 가지고 구매하게 되지만, 직접 매장에 올 때는 음악을 듣고 구경한다는 생각이 더 크다”고 말했다.
각각의 레코드 매장은 음악 장르 만큼이나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1만원대의 중고 음반부터 기본 5만원대로 형성된 최신 LP들도 있다. 희소성이 높은 1970~1990년대 음반은 30~50만원대에 판다. 팝, 가요, 재즈, 클래식 등 장르 역시 ‘변수’다. 재즈 명반은 100만원대에 판매하기도 한다.
마포에 LP 매장이 많이 몰린 것은 이 지역의 특수성 때문이다. 김영혁 김밥레코즈 대표는 “인디 뮤지션과 라이브 클럽이 자생한 음악 환경의 영향으로 홍대 일대에 (레코드숍이) 활발히 생겨나게 됐다”고 봤다.
이곳에 가장 먼저 터를 잡은 것은 지난 1997년에 생긴 메타복스다. 이후 2013년 김밥레코즈와 같이 레이블을 겸하는 레코드 매장이 정착했고, 후발주자들이 줄줄이 따라오게 됐다. 2017년 도프레코드가 마포에 자리잡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김윤중 도프레코드 대표는 “홍대 쪽이 음악 관련 공연, 문화 행사, 클럽이 많은 데다 탄탄하게 자리를 잡은 레코드숍이 있어 자연스럽게 안착하게 됐다”고 말했다. 마포에 ‘바이닐 로드’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지금도 기존 LP 숍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자 하는 사람들의 문의가 많다. 김윤중 대표는 “코로나19 때의 열기와 함께 LP 숍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자리하고 있다”고 봤다.
이처럼 마포에 레코드숍이 늘어나자 이곳만의 ‘독특한 문화’를 알리기 위한 축제도 생겨났다. 올해로 4년째 열린 ‘2023 마포 바이닐 페스타’다. 지난달 막을 내린 이 행사엔 마포 지역 7개 레코드숍(김밥레코즈, 도프레코드, 메타복스, 모스레코즈앤커피, LP도시, 피터판, 홍대널판)과 1600명의 LP 애호가들이 참여했다. 현장에서 레코드를 사고 파는 ‘월드 바이닐 마켓’은 2700만원의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김영혁 김밥레코즈 대표는 “올해로 4회차까지 페스타를 이어오며 LP 시장의 등락과 무관하게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며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바이닐 페스타가 마포에 자리 잡으며 이 일대에 레코드숍이 많이 생기고, 또 자발적인 동네 장터가 만들어지며 지역 경제의 활성화에도 이바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포 지역을 중심으로 LP 수요가 늘며, 자연스럽게 공급망이 안착했다. 다른 지역은 레코드숍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며 부침을 반복하지만, 이곳은 꾸준히 느는 추세다. 현재 이곳에서 영업 중인 레코드 매장은 20여개나 된다. 김윤중 도프레코드 대표는 “최근 몇 년 사이 이태원을 비롯한 용산 인근으로 레코드 매장이 생겼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였고, 마포 쪽으로는 증가 추세”라고 말했다.
바이닐 로드의 레코드 매장은 다양한 형태로 진화 중이다. 각각의 숍마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반영한 생존전략을 세운다. 김밥레코즈는 ‘자체 제작’을 통해 “김밥레코즈에서만 파는 LP”로 차별점을 만든다. 홍대 널판은 LP숍과 음악감상을 겸해 독특한 경험의 시간을 선사한다. 도프레코드는 LP 판매를 넘어 라이프스타일로 영역을 확장했다. 티셔츠, 양말 등 의류는 물론 서적까지 품목을 넓혔다. LP 문화가 확장하는 계기가 되는 지점이다.
김윤중 대표는 “소외 장르의 특성상 록과 메탈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 LP 매장을 중심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등 커뮤니티가 형성된다”며 “방문하는 사람들의 요구로 매장의 형태도 변화하게 됐다”고 말했다.
홍대 일대의 다양한 레코드 매장은 ‘음악 다양성’의 보고다. 미처 몰랐던 음악가를 발굴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새로운 음악을 만난다. 레코드 매장은 단지 ‘판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다양한 음악을 소개하는 ‘음악 도서관’의 역할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의 취향’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 같은 음악을 공유하는 사람들과도 소통하게 된다. 물론 이 영역에서도 다른 대중문화 분야와 마찬가지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따른 ‘취향의 획일화’는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김윤중 대표는 “각각의 레코드 숍은 서로 다른 장르로 차별화하며 음악적 다양성을 유지하고자 하는데, 특정 가수의 LP가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독점하면서 소비자들은 다른 음악엔 관심을 가지지 않는 상황이 빚어져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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