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싫다” 인천공항 온 러시아인 난민신청 폭발…올해만 4000건, 인정 ‘0’[전국부 사건창고]
동원령 후 물밀듯, 작년 한 해 4배
러시아인 ‘난민신청’ 압도적 1위
푸틴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는 소식에 러시아 당국이 ‘가짜 뉴스’라며 부인하는 해프닝 속에 지난해 2월 터진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많은 러시아인이 강제징집을 피해 난민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러시아인의 난민신청이 봇물 터지듯 하지만 심사 회부조차 막히면서 소송도 벌어진다.
28일 서울신문이 입수한 판결문과 본지 취재에 따르면 인천지법 행정1단독 이은신 판사는 지난 2월 A(34)씨 등 러시아 국적 3명이 낸 난민인정 심사 불회부 결정 취소 소송에서 A씨와 B(38)씨 등 2명에게 ‘심사받을 기회를 주라’고 판결했다. C(26)씨에게는 ‘난민 심사 대상이 안된다’고 패소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러시아를 탈출해 한국에 도착한 뒤 난민신청했으나 심사에 회부조차 안 되자 지난해 10월 법무부 인천공항출입국·외국인청장을 상대로 ‘심사 불회부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지난해 9월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탈출한 뒤 1주일쯤 지난 10월 4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는 입국목적을 ‘관광’으로 신고했다 불허됐다. 공항 출국대기실에서 머물면서 난민신청을 했으나 회부되지 않았다. 이유는 난민법상 ‘경제적 이유로 난민 인정을 받으려는 것은 이유 없다’는 것이었다.
B씨는 같은해 9월 러시아를 탈출해 아랍에미리트를 거쳐 9월 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그 역시 입국수속 과정에서 ‘관광’이라고 신고했으나 불허되자 출국대기실에서 생활하며 난민신청했다. 이 역시 같은 이유로 심사에 부쳐지지 않았다. C씨도 같은 시기에 입국했고, 같은 이유로 심사에 회부조차 안 됐다.
이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 징집돼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 이런 징집 거부는 난민 이유가 된다. 심사조차 안 하는 것은 위법하다”고 주장했다.
난민심사 기회 거부당하자 소송
정치적·소수민족 ‘박해’ 가능에 승소
A씨는 면담조사에서 “반정부 시위에 2차례 참가했다. 2021년 가을 러시아 야권 인사가 주최한 정권교체 및 반부패 시위, 그해 말 그 야권 인사 지지 시위에 참여했다면서 “이 일로 특수부대 요원에게 체포돼 구치소에서 6시간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협박과 구타를 당했고, 벌금 1500루블(현재 환율로 2만 2000원 정도) 처분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그는 자신이 집에 없을 때 징집담당관이 소환장을 들고 찾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탈출했다고 했다. 탈출 후에도 또다시 찾아와 아내에게 소환장을 전달했다고 했다.
A씨는 “러시아로 돌아가면 반정부 시위 전력 때문에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 배치될 것”이라고 말했다.
B씨는 “지난해 8월 4중 추돌 교통사고 때 내 차는 중간에 끼었는데 경찰조사에서 가해자로 지목됐다”면서 “다른 차량 운전자들이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감금, 폭행하고 ‘외눈 해적을 만들겠다’고 협박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그는 “이같은 생명 위협을 받는 와중에 징집을 앞둬 러시아를 탈출했다”고 했다.
C씨는 러시아·키르기스스탄 이중 국적자로 2018년 결혼 후 키르기스스탄에 살았다. 그는 “지난해 9월 러시아에 사는 어머니한테 내 징집통지서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혼자 한국으로 입국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9월 강제 동원령을 내리고, 이후에도 정부가 추가 병력을 모집할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자 러시아 청장년들이 조국을 버리고 잇따라 해외로 ‘엑소더스’해 한국에도 몰려드는 상황이다.
우리나라 난민법은 난민심사 기회를 주지 않는 사유로 ‘박해 가능성이 없는 안전 국가 출신이거나 안전 국가에서 온 경우’와 ‘오로지 경제적 이유로 난민이 되려는 등 명백한 이유가 없는 경우’를 들고 있다.
재판부는 A씨에 대해 “징집 거부가 병역 반감이나 전투 공포만이라면 안 되겠지만 정치적인 의견 표명에 대한 박해라면 난민 심사 기회를 줘야 한다”며 “반정부 시위에 참여해 고초를 겪고 이 전쟁의 성격 등을 볼 때 박해받을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심사로 구체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판시했다.
B씨에 대해서는 “정치적 활동을 한 적은 없으나 B씨가 타지크인으로 소수민족에게 징집이 집중돼 피해를 크게 입을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된다”며 “B씨가 ‘러·우 전쟁은 정치적 침략이고, 내가 우크라이나인이었다면 참전했을 것’이라는 진술로 볼 때 징집 거부가 정치적 동기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C씨와 관련 “이중 국적자로 키르기스스탄에 보호를 요청하거나 거부된 적이 없고, 키르기스스탄이 러시아인의 입국을 거부했다거나 피신해온 러시아인을 강제 송환했다는 사례를 보고받은 적도 없다”며 “키르기스스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난민신청은 뚜렷한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법무부 항소 “난민신청 속출 우려”
“공항의 국경관리 기능에도 장애”
이 판결 후 법무부는 항소를 제기했다. 법무부는 “전쟁 강제징집을 피해 온 러시아인들에게 심사 기회를 주면 유사한 난민신청 사례가 속출할 수 있다. 출입국항의 난민 심사가 위축되면 공항의 국경관리 기능에 장애가 생길 우려도 있다”며 “우리 국익과 인도주의 원칙을 모두 고려한 조치”라고 강조했다.
난민인권네트워크 등은 “법무부가 살상을 거부한 이들에게 난민 심사의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인천국제공항 출국대기실에 사실상 장기간 방치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A씨와 B씨는 승소 후 인천공항 출국 대기실에서 영종도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로 옮겨졌고, 법적 판단이 끝날 때까지 장기 체류하게 된다.
법조계에서는 이 판결과 관련 “출입국관리소는 전쟁하는 러시아를 떠나 난민 신청하니 단순 징집거부로 보여 심사에 회부조차 안 한 것이고, 법원은 단순 징집 거부로 볼 수 없으니 난민 심사는 하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밖에도 “징집에 응하지 않은 것을 박해로 볼 수 있느냐.” “한국에서 징집 거부가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거부가 난민 인정 사유가 되면 모순이다.” “심사 회부조차 안 하는 건 난민 유입 억제 목적이 있는 듯한데, 정치적인 의견 표명이 없는 러시아인은 결국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등 의견이 분분하다.
법무부의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지난달까지 러시아인의 난민신청은 총 4037건으로 벌써 작년 한 해 1038건의 4배에 육박하고 있다. 이 기간 전체 1만 3365건의 30%를 차지하는 압도적 1위다. 하지만 러·우 전쟁 후 러시아를 탈출해온 그들에게 난민 인정한 것은 한 건도 없다.
한상봉·이천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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