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행복했던 기억이 '추행'이라는 이름으로 더럽혀졌습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처참히 짓밟혔고, 연인과의 행복했던 기억은 '추행'이라는 이름으로 더럽혀졌습니다. 동성애자로 살아왔던 저의 삶과 정체성 역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2017년 성소수자 군인 색출 사건 피해자 A씨가 헌법재판소의 군형법 제92의6 합헌결정을 앞두고 작성한 입장문이 공개됐다. 군인권센터는 27일 해당 입장문을 공개하며 "선고에 앞서 작성자가 군인권센터로 보내온 입장문"이라고 밝혔다.
A씨는 2017년 육군 사건의 피해자로, 헌법재판소 기소유예처분취소 권리구제 헌법소원을 제기한 7명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헌법재판소의 군형법 제92의6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을 앞두고 사건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조롱하듯 연인과의 성관계에 관해 묻던 군사경찰 수사관의 말 등 "마음 깊은 곳에 파편처럼 박혀있었던 그 날의 기억이 폭발하듯 머리를 울렸다."
육군 성소수자 군인 색출 사건이란 2017년 당시 군수사단이 군대 내 군형법 제92의6 위반 혐의자들을 대량 수사 및 기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군인 등에 대해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군형법92조의6은 합의여부와 상관없이 동성 간 성행위 자체를 처벌할 수 있도록 명문화돼 있기에, 해당 수사는 사실상 '추행사건'이 아닌 '군 내 성소수자'를 색출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A씨가 겪은 것처럼, 당시 수사과정에서 군 수사관들은 수사 대상인 성소수자들에 대해 직접적인 인권침해를 가하기도 했다.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가 피해자들에 대한 심층조사 끝에 지난 2019년 발간한 관련 보고서는 2017년 당시 수사를 받은 군인들이 수사과정에서 △사생활 침해 △강제적 아웃팅 △폭언·폭행·따돌림 등 "군대 안팎에서의 학대와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앰네스티와의 인터뷰에 응한 김여준(가명) 씨는 해당 보고서에서 2017년 3월 육군중앙수사단이 김 씨의 군형법 92조의 6 위반사항을 밝히기 위해 김 씨를 전 애인 A 씨와 강제적으로 대면(화상통화)케 하고, 이후 "어떤 체위로 관계를 가졌느냐", "어디에 사정했느냐"와 같은 "모욕적인 질문들을 쏟아부었다"고 진술했다.
색출사건은 직접 수사받거나 처벌받지 않은 성소수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쳤다. 인터뷰에 응한 또 다른 성소수자 군인 김명학(가명) 씨는 17년 군 당국의 수사 당시에 기소되진 않았지만 "군 간부가 원한다면 법을 선택적으로 집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강한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이후 그는 실제로 동료 및 지휘관에 의해 아웃팅 및 모욕 피해를 당했고 "필요할 때 보호를 받을 수 없을 것 같다"는 그의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헌재 판결을 앞두고 입장문을 쓴 A씨 또한 당시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23명의 피해자들 중 한 사람이다. 수사결과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A씨는 군형법제92의6이라는 부당한 법률로 인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날 헌재에선 2017년 육군 성소수자 색출 사건의 피해자들이 제기한 3건의 위헌법률 헌법소원과 7건의 권리구제 헌법소원, 2019년 해군 성소수자 색출 사건의 피해자가 제기한 1건의 권리구제 헌법소원, 2021년 군 내 성폭력 피해자가 제기한 1건의 권리구제 헌법소원, 그리고 군형법 제92의6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2건이 다뤄졌다.
헌재는 A씨 등 7인이 제기한 기소유예처분취소 관련 '권리구제' 헌법소원에 대해서는 인용(기소유예처분 취소)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인 군형법 제92의6 조항에 대한 3건의 '위헌법률' 헌법소원에 대해서는 재판의 전제성을 충족하지 못했다며 전원일치 의견으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헌법소원의 원인이 되는 소송 건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실제 대법원은 군형법의 해당 조항에 대해 제동을 걸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전원합의체 회의에서 군형법 제92조의6과 관련해 "사적 공간에서 자발적 의사 합치에 따라 이루어지는 등 군이라는 공동 사회의 건전한 생활과 군기를 직접적, 구체적으로 침해한 것으로 보기 어려운 경우" 해당 조항을 적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합의 하에 이루어진 성관계를 처벌할 수 있게 하는 해당 조항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대법원 판결 등을 이유로, 그 조항의 위헌성을 따져달라는 헌법소원을 각하시킨 헌재의 이번 결정은 다소 모순적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날 헌재는 같은 조항과 관련해 별개로 제기된 2건의 위헌법률 심판에 대해선 5대4 다수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합헌의 사유로는 "동성 군인 간의 성적 교섭행위를 방치할 경우 군대의 엄격한 명령체계나 위계질서가 위태로워진다"며 "이성 군인과 달리 동성 군인 간 합의에 의한 성적 행위를 처벌하는 것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각하된 3건의 위헌법률 헌법소원에 대해서는 해당 조항의 문제를 짚은 대법원 판결을 사유로 내세웠지만, 정작 해당 조항 자체에 대한 판단에서는 그 문제를 인정하지 않은 셈이다.
군인권센터는 26일 헌재 판결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대법원 판결 뒤에 숨어 책임을 방기할 것이면 헌법재판소가 뭐 하러 존재하는가" 물으며 "뿐만 아니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전에 사적 공간에서의 합의된 성관계를 이유로 형사처벌이 확정된 이들은 구제받을 길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헌재의 이번 결정은 지난 2002년 첫 합헌 결정 이후 4번째로 이뤄진 같은 조항에 대한 합헌 결정이다. 센터는 "(지난 2017년 육군 사건 이후로) 2019년 해군에서도 3명의 성소수자 군인이 색출 당해 수사를 받았다"라며 "20년 째 헌법재판소가 성소수자 군인의 인권 침해를 묵인, 방조, 옹호, 지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A씨가 싸우는 와중에도 군에선 A씨와 같은 피해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다. 앰네스티는 A씨의 사건 당시 보고서에서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질 경우 결국 사회 전체가 "게이, 양성애자 혹은 그 외 성별 규범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사랑할 자유, 연애할 자유, 성적 만족을 추구할 자유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강조한 바 있다. 진보가 그렇듯 차별도 확산한다.
"부대에서 주변으로부터 인정받았던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은 처참히 짓밟혔고, 연인과의 행복했던 기억은 '추행'이라는 이름으로 더럽혀졌다"고 당시를 기억하는 A씨는 이날 입장문에서 "이런 야만이 비단 저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제 삶에 행해졌던 가장 내밀하면서 잔인했던 공격. 그것은 국가 기관인 군대가 시민에게 자행했던 국가적 폭력이었다"라고 돌이켰다.
헌재의 이번 판결로 군형법 내 '동성애 차별법안'은 여전히 군에서 효력을 발휘하게 됐다. 국가별정례인권검토(UPR)와 국제연합(UN) 자유권위원회 등 국제사회의 폐지 권고가 계속되고 있지만 당장의 피해자들, 당장의 차별받는 개인들에게는 점진적 진보란 먼 얘기에 불과하다.
이번 판결에서 합헌에 표를 던진 5명의 다수 재판관들은 "합의에 의한 성적 행위라 하더라도 근무 장소나 임무 수행 중에 이뤄진다면 국가의 안전보장 및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지는 국군의 전투력 보존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며 "처벌한다고 해도 과도한 제한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17년, 2019년 그리고 이어지고 있는 군 내 차별 피해자들에게 '그 차별은 정당하다'고 공언한 셈이다. 근무 장소도 임무 수행 중도 아닌 상황에서 사랑했다는 이유로 수사를 받았던 A씨는, 헌재의 결정을 앞두고 다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선고 결과가 어떨까요. 제가 겪었던 아픔과 고통을 앞으로 다른 사람들은 겪지 않을 수 있게 되었기를 바랍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습니다. 헌법재판관님들, 그리고 시민 여러분. 제가 바라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죄인 취급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건강하고 행복한 미래를 그려나가고 싶습니다."
[한예섭 기자(ghin2800@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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