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서로의 구원이 된 소녀들…아밀 “위안 주는 이야기이길”

박세희 기자 2023. 10. 28. 10: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소설 ‘너라는 이름의 숲’의 아밀 작가. 허블 제공

기후 위기로 전 지구에 찾아온 디스토피아, 서울엔 흙먼지가 날리고 모래비가 날린다. 폐허가 된 이 곳에서 홀로 싱그러운 아이돌 ‘이채’와 ‘이채’를 사랑하는 평균 이하의 소녀 ‘정숲’.

디스토피아를 살아가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너라는 이름의 숲’(허블)의 작가 아밀(본명 김지현)을 최근 만났다.

소설의 배경이 흥미롭다. 기후 위기로 폐허가 된 ‘실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뿐이다. 돈이 있고 권력을 가진 이들은 가상현실을 살아간다. 좋은 사립학교는 모두 가상현실로 운영된다. 여유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공기청정시스템이 갖춰지고 깨끗하게 소독된 안전한 집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며 대학 입시를 준비한다.

이러한 설정에 대해 아밀 작가는 "팬데믹의 영향"이라고 했다. "팬데믹 동안 가상현실을 통한 소통이 본격화됐잖아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등으로 우리의 삶을 보기 좋게 가공해 전시하는 것도 일상이 됐고요. 그래서 가상현실로만 스스로를 인식하고 표현하고 교류하는 세상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이 소설의 시작이 됐어요."

소설의 주인공 중 한 명을 아이돌로 설정한 것에 대해선 "아이돌이 그런 식의 매커니즘을 수행하는 대표적인 존재"라고 답했다. "현실과 가상의 괴리를 가장 잘 느끼게 하는 이들이 아이돌 같아요. 그래서 아이돌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채와 숲을 아이돌과 팬으로 설정한 데에는 작가 본인이 여자 아이돌의 팬이라는 점도 한 몫 했다. 작가는 트위터 등 SNS를 통해 지속적으로 아이돌에 관한 글을 올릴 정도로 상당한 ‘덕력’을 지니고 있다. 이에 소설에선 덕질에 관한, 특히 여자 아이돌 덕질에 관한 깊이 있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러블리즈가 제 첫 최애였어요. ‘Destiny’(데스티니) 때부터 좋아했죠. 이달의 소녀, 뉴진스도 좋아해요."

작가는 나아가 아이돌 산업이 가지는 근본적인 병폐에 대한 문제도 제기한다. "누군가를 향한 지극히 개인적인 사랑과 진심이 거대한 폭력적 산업을 지탱할 수도 있다는 것은 저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입니다. 그럼에도 그 사랑이 진실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신비로운 일이지요."

아밀은 "다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게 소설가로서의 나의 역할"이라고 했다. "사실 이건 너무 풀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소설이란 형식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 역할은 이런 문제 의식들을 다 같이 생각해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역할을 어느 정도는 한 것 같아요."

아밀 작가는 ‘소녀’ 전문 작가라 할 만큼,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해왔다. 2018년 SF어워드 우수상을 받은 ‘로드킬’과 2020년 SF어워드 대상을 수상한 ‘라비’ 모두 소녀들의 이야기다. ‘스스로 구원이 된 소녀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너라는 이름의 숲’ 역시 주제는 전작들과 비슷하나 분위기는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채를 사랑하는 숲의 진심을 마주하며 우리는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감각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깨닫게 된다.

"예전에는 제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을 남성 권력자로 상상하고 ‘그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썼는데 최근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연약하고 착취당하고 소외당하는 그런 분들이 제 글을 읽으실 때 더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소설에도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나오지만 위안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소설가와 번역가 일을 병행하고 있는 그는 차기작에 관한 질문에 현재 진행 중인 번역 작업이 끝나면 중편소설을 쓸 예정이라고 전했다. "미학을 전공하는, 미학자에 관한 이야기예요. 여성에게 가해지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에 대해 생각하는 소설이 될 것 같아요."

박세희 기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