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시대 종말이라며? 빅 오일은 왜 M&A 하나[딥다이브]

한애란 기자 2023. 10. 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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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시대의 종말이 다가온다’라는 이야기 나온 지 오래됐죠. 최근 이런 관측을 무색하게 만드는 깜짝 소식이 연이어 나왔습니다. 미국의 석유 공룡, 엑손모빌과 셰브론이 각각 석유·가스 생산회사와의 초대형 M&A를 발표했죠.

재생에너지 확대, 전기차 보급으로 화석연료 수요가 곧 꺾일 거라는 예측 따윈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데요. 도대체 석유시대는 지금 어느 국면에 있는 걸까요. 저물어가나요, 아직 창창한가요. 석유 메가딜과 엇갈리는 석유시장 전망을 들여다보겠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석유기업 엑손모빌과 셰브론이 경쟁적으로 대형 유전 확보를 위한 M&A에 나섰다. 25년 전 엑손과 모빌이 합병한 뒤 최대 규모의 딜이다. 사진은 텍사스에서 시추 중인 가스 유정. AP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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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년 피크 오일’ 예측한 IEA

글로벌 석유업계에 모처럼 초대형 딜이 나왔습니다. 이달 11일 엑손모빌이 셰일가스 시추업체 파이오니어 내추럴 리소시스를 595억 달러(약 80조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고요. 이어 23일 경쟁사 셰브론이 석유·가스 생산업체 헤스를 530억 달러(약 71조원)에 인수한다고 공개했습니다. 1998년 미국 엑손과 모빌사의 합병(803억 달러) 이후로 25년 만에 석유업계 사상 가장 큰 딜 1, 2위라고 합니다.

엑손모빌과 셰브론은 지난해 기록적인 수익을 올려 현금이 넘치는 거대 기업입니다. 최근에도 국제유가 상승 덕을 톡톡히 보고 있고요. 그럼에도 이번 M&A 소식은 시장을 놀라게 했는데요. 거대 석유기업들이 석유시장의 중장기적 성장에 베팅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M&A의 의미를 살피기 전에 석유시장 전망부터 따져볼까요. ‘피크 오일(Peak Oil)’이란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석유생산량이 최대치에 도달해 꺾이기 시작하는 시점을 일컫는 용어인데요. 이 이론을 만든 미국 지질학자 킹 허버트는 1974년 “세계 석유생산량이 1995년 정점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보시다시피 석유시대는 여전히 번성 중인데요.

하지만 그 시점을 계속 늦춰잡고 있을 뿐, 피크 오일 전망은 여전히 나옵니다. 지금은 석유생산량 대신 석유 수요를 기준으로 정점을 계산한다는 게 과거와는 달라진 점이죠. “돌이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듯, 석유시대도 석유가 고갈되기 전 종말을 고할 것”이란 중동 석유왕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전 사우디 석유장관)의 유명한 발언이 떠오릅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30년 화석연료 수요가 정점에 다다를 것으로 예상했다. 석탄과 달리 석유와 천연가스 수요는 가파르게 줄진 않지만, 서서히 완만하게 감소할 거란 예측이다. IEA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4일 발표한 연례보고서에서 전 세계 화석연료 수요가 정점을 치는 시점을 2030년으로 전망했습니다. 전기자동차 보급이 빠르게 늘어나고, 각국이 청정에너지를 늘리고 있다는 게 전망의 근거이죠. 다만 수요 위축은 서서히 진행될 걸로 내다봤습니다. 2020년대 후반 하루 최대 1억200만 배럴까지 늘어난 석유 소비가 2050년쯤엔 9700만 배럴로 감소한다는 예측입니다. 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은 보고서 발표 전인 9월 FT 기고문에서 “끝이 없어 보이는 화석연료 성장의 시대가 10년 안에 끝날 것”이라고 설명했죠. ‘석유 관련 예측의 표준’으로 여겨지는 IEA가 내놓은 전망이다 보니 상당한 무게가 실렸습니다.

‘석유 소비 계속 는다’는 OECD

하지만 OPEC(석유수출국기구)의 전망은 완전히 딴판입니다. OPEC은 IEA 사무총장의 FT 기고문이 나오자 발끈해서 즉시 반박자료를 내기도 했는데요. 이어 9일 하이탐 알 가이스 OPEC 사무총장은 “2022년 하루 9960만 배럴인 석유수요가 2045년까지 계속 늘어나서 하루 1억1600만 배럴이 될 것”이란 OPEC의 예측치를 공식적으로 공개합니다. 유럽 각국이 ‘에너지 안보’를 중시하면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늦추고 있는 데다, 신흥국의 인구와 경제성장이 빨라지고 있다는 게 예측의 근거입니다. 전기차발 수요감소론에 대해서도 “전기화가 어려운 상업용 차량이 증가한다”며 정반대 시각을 드러냈죠.

석유수출국기구는 9일 2045년까지의 석유수요 전망치를 발표했다. 석유수요가 꾸준히 증가해 2045년에는 지난해보다 16% 많은 하루 1억1600만 배럴이 될 거란 예측이다. OPEC
IEA와 OPEC이 석유종말론을 두고 한판 붙는 모양새입니다. 1970년대에 IEA 설립을 주도한 게 OPEC이란 점에서 아이러니하죠.

석유업계 최고경영자들 역시 OPEC과 같은 입장인데요. 엑손모빌에 팔리는 파이오니어의 스캇 셰필드 CEO는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IEA가 우리 제품에 대한 수요를 오해하고 있다”면서 “(IEA 예측에) 나는 동의하지 않고 메이저 업체와 OPEC, 석유와 가스를 생산하는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누가 제트연료(항공유)를 대체하나? 누가 석유화학 제품을 대체하나? 어떤 대안이 있나?”라고 반문했는데요.

셰브론의 마이크 워스 CEO 역시 FT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현실세계에 살고 있고, 실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본을 배분해야 합니다. 석유수요는 2030년 이후에도 계속 증가할 겁니다.”

석유·가스 생산 늘리는 메이저들

석유 메이저의 메가딜 역시 이런 낙관적 전망에 무게를 싣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번 딜로 두 미국 석유기업은 든든한 먹거리를 확보했습니다. 엑손모빌은 파이오니어를 인수함으로써 석유·가스 생산량을 단숨에 20%나 늘리게 됐고요. 셰브론은 헤스를 사들이면서 ‘최근 10년간 발견된 유전 중 세계 최대’이라는 남미 가이아나 해안의 스타브록 광구 운영에 참여하게 됐죠.

유럽 기업과 달리 미국 석유기업들은 그동안에도 석유 생산량을 꾸준히 늘려왔다. 그리고 이번엔 대형 M&A를 통해 그 규모를 확 키우게 됐다. 사진은 셰브론의 캘리포니아 리치몬드 정유공장. AP 뉴시스
미국 석유기업들이 공격적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섰다면, 유럽계 석유 메이저들은 다시 석유로 빠르게 유턴 중입니다. BP와 셸(영국), 토탈에너지(프랑스)는 2010년대 후반 들어 태양광·풍력 사업을 엄청 키워왔죠. 석유 회사가 아닌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기 위해 재생에너지 기업을 잇달아 인수하며 공격적으로 투자해왔는데요. 그랬던 유럽계 기업들이 방향을 전환 중입니다. 왜냐. 화석연료에 비해 재생에너지가 돈이 안 되거든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석유·가스값이 급등했죠. 유럽 각국이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대체할 곳을 찾느라 분주했고요. 반면 태양광·풍력 발전은 금리 인상과 각종 자재비 인상의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기업 입장에선 수익성을 높이고 주가를 부양하기 위해선 석유시대에 좀더 오래 머무는 게 나은 선택이 된 거죠.

셸은 올해 1월 새 CEO가 취임한 뒤 가스 생산량을 늘리기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지난달엔 북미와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LNG 프로젝트를 탐색 중이라고 공개하기도 했죠. 토탈에너지 역시 천연가스를 중심으로 2028년까지 생산량을 연 2~3%씩 늘리겠다는 계획입니다. 재생에너지에 올인했던 BP도 슬그머니 발을 빼고 있는데요. BP는 2030년까지 석유·가스 생산량을 40%나 줄이겠다는 계획을 올 2월 수정해, 25%만 줄이겠다고 밝혔습니다. 다시 수익성 좋은 석유와 가스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통합의 물결은 이제 시작

여기까지 보시면 ‘IEA 예측은 틀렸고, 석유시대 종말은 없는 건가’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만약 석유가 계속 번성할 거라면, 파이오니어와 헤스는 왜 기업을 판 거죠?

블룸버그에 따르면 파이오니어는 엑손모빌에 단 9%의 프리미엄만 받고 지분을 넘겼습니다. 헤스 역시 셰브론에 매각되면서 챙긴 프리미엄이 10%에 불과하죠. 이전 25년 동안의 에너지 업계 M&A의 평균치(26.5%)와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입니다. 시장 전망이 좋다고 보기엔 너무 싸게 주식을 넘긴 셈입니다.

석유시대, 끝나나 안 끝나나. 잘 모르겠으면 일단 덩치를 키워 버티자? 게티이미지
‘왜 회사를 파느냐’는 투자자 질문에 헤스 창업자의 아들인 존 헤스 CEO는 “우리 주가가 꽤 올랐다”고만 답했습니다. 주가가 5년 동안 161% 상승했으니 틀린 말은 아닌데요. 하지만 석유·가스 수요가 계속 늘어서 이 사업이 앞으로도 대박 날 거라고 봤다면 지금 타이밍에 팔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이를 두고 FT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셰브론과 엑손모빌의 막대한 지출은 석유시대의 연장이 아니라, 에너지 불확실성이란 새로운 시대를 반영한다.’ 거대 기업들이 미래를 밝게 봐서가 아니라, 불확실하다고 보고 일단 몸집을 키워 방어에 나서고 있다는 거죠. 경쟁사보다 더욱더 싸게 석유를 생산할 수 있다면, 나중에 혹시 수요가 꺾이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그보다 작은 기업들은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대신 지금 기꺼이 기업을 팔고 있고요. 환경보호기금의 부회장인 마크 브라운스타인은 “인수합병 물결은 기존 비즈니스 모델에서 마지막 빛을 짜내려는 노력”이라고 평가합니다.

지금의 석유업계 M&A 물결이 석유시대 번영의 상징인지, 마지막 발버둥인지는 좀더 지켜봐야 답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다만 분명해보이는 건 유럽의 석유 메이저들도 뒤처지지 않기 위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건데요. 투자업계에선 영국에 본사를 둔 BP와 셸이 합병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경쟁하려면 규모가 필요하다”(투자회사 베리텐의 아준 무티 분석가)는 이유인데요. 물론 BP와 셸은 이런 시장 관측에 대해 논평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선 벌써부터 ‘다음 딜’을 기대하는 분위기입니다. By.딥다이브

‘나이지리아인들은 테슬라를 운전하거나 태양전지판으로 집에 전력을 공급하지 않을 거다‘. 셰브론의 헤스 M&A 소식을 다룬 월스트리트저널 사설이 석유 수요 전망을 두고 설명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여러분은 석유시대 종말론을 어떻게 보실지 궁금합니다.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이달 들어 엑손모빌과 셰브론, 두 거대 석유공룡이 잇달아 석유·가스 생산기업을 M&A했습니다. 그 규모가 25년 만에 최대 수준이어서 업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IEA는 ‘화석연료 수요가 2030년을 정점으로 꺾인다’는 예측을 발표했습니다. 전기차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으로 석유 수요가 서서히 줄어들 거란 전망이죠.

-반면 OPEC은 계속 증가한다고 내다봅니다. 저소득국가의 인구와 경제가 모두 빠르게 성장할 거기 때문이라는데요. 이미 석유기업들은 돈 안 되는 재생에너지 투자는 줄이고 다시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을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전망이 극과 극으로 갈리는 ‘에너지 불확실성’의 시대인데요. 일단은 덩치를 키우는 게 석유기업에겐 나은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자, 다음 M&A는 어디가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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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기자 har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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