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共의 지방어 말살 정책, 홍콩 시민 “광둥어가 좋아요!”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3. 10. 2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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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10회>

<2018년 광둥어 보호를 위해서 모여 시위하는 ‘항어학(港語學)’ 협회의 회원들. “나의 모어(母語)는 광둥어다”라는 구호가 보인다. /rfa.org>

보통화 강요, 광둥어 말살 정책

2023년 8월 홍콩의 국가 보안 경찰은 영장도 없이 지난 10년간 광둥어 보호 운동에 앞장서 왔던 단체 ‘항어학(港語學, 홍콩어학)’ 협회의 회장 앤드루 찬(Andrew Chan, 28세)의 자택을 급습했다. 경찰은 가족을 압박하여 호주에 체류 중인 그에게 협회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단편소설 한 편을 삭제하라 요구했다. 3년 전 그 협회에서 개최한 광둥어 작품 경연대회에서 최종심에 오른 이 작품은 독재정권이 지워버린 홍콩의 역사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는 한 청년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가족이 볼모로 잡혔음을 깨달은 찬은 부득이 협회의 해산을 결정했다.

홍콩 사람들의 모어(母語)와 입말(口語)은 광둥어(廣東語)다. 남방 월족(粤族)의 말, 곧 월어(粤語)다, 홍콩말이란 의미로 항어(港語)라고도 한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광둥어의 언중(言衆)이 현재 1억여 명에 달한다. 중국공산당은 현재 오랜 역사를 지닌 그 아름다운 언어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 중국의 지역 언어 말살 정책은 이미 10년 넘게 지속되었다. 2010년부터 광저우 아시안 게임 즈음해서 중국 정부는 광둥성 지역 방송국에서 광둥어 대신 보통화로 방송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이때 광둥성의 네티즌들은 “광둥어는 방언이 아니라 지역의 공통어(lingua franka)”라는 구호 아래 거세게 반발하는 온라인 집단 시위를 연출했다. 광둥성 사람들이 고유의 모어와 입말을 지키려는 운동은 그 자체가 중공 중앙의 전일적 지배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다. 이후 2014년과 2019년 두 차례에 걸쳐서 홍콩의 시민들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대규모 반중 시위를 연출했다. 이에 작심한 중공 중앙의 본격적인 홍콩 탄압이 시작되었다.

2010년 베이징 중앙정부가 보통화를 강요할 때 홍콩에서 “나는 광둥어를 사랑해요! 나는 보통화를 몰라요!”라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시민. 비꼬기 위해서 보통화(普通話)를 광둥어로 발음이 같은 “煲冬瓜”로 적었는데, 그렇게 되면 의미가 “삶은 겨울 오이”가 된다. /Lisa Lim, South China Morning Post. “Language Matter (9/29/2017)

2020년 6월 30일 홍콩 국가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킨 후, 중공 중앙의 탄압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비단 홍콩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공 중앙의 지방 언어 정책은 티베트족과 위구르족 등 중국의 소수민족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서 표준어가 아닌 소위 “방언(方言)”을 쓰고 있는 모든 지역 주민을 겨냥한 지방어 말살 정책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구호 아래 조선어 금지령을 내리고 조선인의 언어생활과 사고 습관까지 통제하려 했던 일제의 강압적 통일 정책을 그대로 닮아있다.

언어 획일주의와 지방어의 쇠락

과거 동아시아의 공통어는 한문이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는 다수 언중의 일상어를 제 나라의 말로 삼는 “자국어 혁명(vernacular revolution)”이 일어났다. 한문을 버리고 백화(白話)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중국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갔지만, 최소 300여 개의 소위 “방언(方言)”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는 대륙 국가 중국에서 전국을 언어적으로 통합하는 과정은 지난했다.

표면상 오늘날 중국은 이미 보통화(普通話) 정책으로 언어적 통일을 이룬 듯한 모습이다. 보통화의 연막을 걷어내고 중국인의 언어적 현실을 직시하면, 국민의 80% 이상이 한 개 이상의 지역 “방언”을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하게 된다. 중국에선 흔히 “방언”을 독자적 언어가 아닌 표준어의 사투리 정도로 취급하지만, 언어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중국의 방언은 유럽 여러 나라의 다양한 언어들에 비견되는 개별적 독립 언어이다.

사투리라 해봐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북한말까지 이해할 수 있는 한국 사람들로선 오늘날 중국의 언어적 다양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흔히 한자(漢字)가 표의(表意) 문자라서 시대적 변화와 지역적 차이를 넘어서 보편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은 안 통해도 한자로 쓰면 다 통할 듯하지만, 필담 능력이 실은 외국어 구사력과 다르지 않다. 베이징 사람과 필담이 되려면 보통어 문법을 따라야 한다.

한자가 문자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표음 문자 이상으로 소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한자의 80% 이상이 소리와 뜻이 합쳐진 형성자(形聲字)이다. 한자로 표기되는 말은 특정 지역의 특정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 지역의 일상어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따로 공부하지 않는 한 한자로 적힌 그 지방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

1910년대부터 “신청년”지 등의 매체에서 적극적으로 백화 운동을 벌였던 현대 중국철학의 거장 후쓰(胡適, 1891-1962). /공공부문

광둥어를 한자로 표기하면 베이징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다. 광둥어와 베이징어의 차이가 영어와 불어의 차이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이 불어를 읽으면 알 수가 없듯, 베이징 사람은 광둥어를 읽지 못한다. 한자로 쓰면 다 알지 않냐고 생각하겠지만, 한자로 표기된 광둥어 책자를 보면 베이징 사람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른바 어기(語氣) 조사(助詞)가 즐비하다. 예컨대 吖, 嗄, 呀, 𠵝, 咓, 𠻺 등은 로마자로 표기하면 모두 aa가 되며, 성조가 각기 1, 2, 3, 4, 5, 6성에 해당한다. 광둥어 특유의 조사가 섞인 문장을 다른 지방 사람들은 따로 학습하지 않은 한 알 길이 없다.

언어학자들은 두 언어 사이의 상관성을 밝히기 위해서 보통 어휘 통계학(lexicostatistics)에 의존한다.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기초단어의 유사성을 따져 보면, 두 언어 사이의 원근 거리를 판별할 수가 있다. 두 언어 사이에서 기초단어의 어휘적 유사성(lexical similarity)은 서로의 연관성을 나타내는 지표다. 기초단어의 목록을 놓고 영어와 독어를 비교하면 60% 정도의 어휘적 유사성이 있는데, 불어와 비교하면 27%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어휘적 유사성이 85%에 달하면 같은 언어의 사투리라 말할 수 있다. 그 기준에서 보면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영어, 독어, 불어는 별개의 독립적 언어임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 보통화를 사용하여 언어와 문자의 규범화를 이루자” 2008년 상하이의 한 유치원 담벼락에 붙은 표준어 보급 구호. /공공부문

어휘적 유사성에 따라 현재 중국의 여러 지방어를 비교·분석해 보면, 중국의 언어적 다양성에 놀라게 된다. 중국인들이 흔히 방언이라 부르는 여러 지방의 말들은 각기 서로 다른 독립된 언어들이라 해도 무리가 없다. 대부분 중국-티베트어족(Sinitic-Tibetan langauges)에 속한다고 하지만, 중국 지방어들 사이의 차이는 여느 유럽어 사이의 차이보다 크다. 예컨대 베이징어와 광둥어의 어휘적 유사성은 24%밖에 되지 않는다.

쑤저우(蘇州, 장쑤) 28.9% 푸저우(福州, 푸젠) 26.9% 원저우(溫州, 저장) 21.7%

차오저우(潮州, 광둥) 21.3% 광저우(廣州, 광둥) 24% 메이셴(梅縣, 광둥) 21.4%

샤먼(廈門, 푸젠) 19.8% 난창(南昌, 장시) 44.2% 창사(長沙, 후난) 46.1%

지난(齊南, 산둥) 67.1% 청두(成都, 쓰촨) 44.7% 한커우(漢口, 후베이) 미상

<지방어와 베이징어의 어휘적 유사성 (%), (Tang and van Heuven, 2007)>

14억의 인구가 뒤섞여 사는 중국에 이 정도 언어적 다양성이 있음은 자연스럽다. 유럽에 여러 언어가 있듯 중국에도 여러 언어가 있다. 다만 중국에선 고래로 한자를 써왔기 때문에 여러 지역의 수많은 개별 언어는 제대로 표기되지 못한 채 입말로만 사용됐을 뿐이다. 한글 창제 이전 글로 표기되지 못한 한국어와 상황이 비슷하다. 이두나 구결을 쓰기는 했지만,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하기는 힘들었다. 한글 창제 이후에야 언문일치의 표기가 가능해졌다.

광둥어를 제외한 중국 여러 지방어는 한자 표기법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중공 중앙은 지방어를 개별 언어가 아니라 방언, 지방어, 사투리 정도로 격하한다. 언중 1억의 광둥어가 독립적인 개별 언어의 지위를 갖게 되면, 중국은 공식적으로 다언어 국가로 전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에선 진시황(秦始皇) 이래 문자를 획일화하고 관화(官話, 만다린)를 보급하는 언어 통일 정책이 여러 조대(朝代)에 걸쳐 장시간 꾸준히 이어져 왔다. 1910년대부터 중국 지식인들은 백화(白話)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때 백화란 실은 베이징 관화를 전국적으로 보급하는 언어 통일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 남방에서 지방어를 쓰며 자란 사람들이 백화체의 문장을 읽고 쓰려면 당연히 북방의 구어와 베이징 관화를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구미 선교사들이 발견한 중국의 개별 언어들

15세기 이래 점진적으로 라틴어의 영향에서 벗어난 여러 지역의 다양한 유럽인들은 각자 집안과 마을에서 배우고 익힌 모어(母語)와 입말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했다. 그 결과 유럽에서는 라틴어에 눌려서 문어(文語)의 지위를 누릴 수 없었던 토속어(vernacular)가 새롭게 형성되는 민족국가의 자국어로 발전했다. 장시간 라틴어를 공통언어로 써왔던 유럽의 지성계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언어를 가진 다언어의 대륙으로 재탄생되었다.

근세 유럽인들에게 모어의 발견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누구나 엄마 품에서 배우고 자라 길거리에서 마을 사람들과 주고받은 바로 그 말을 사용해서 자유롭게 글을 쓰고, 나아가 최고의 지적 활동까지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박사 논문까지 라틴어로 썼던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50세가 넘어 근대 철학의 고전이 된 3대 비판서를 독일어로 집필했다. 근대 독일 철학이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의 긴 역사에서 한자는 여러 지역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지방어들 사이의 차이와 갈등을 숨기고 억누르는 기능을 수행해 왔다. 만약 중국의 수많은 지방어를 모두 로마자로 표기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전 세계 모든 언어는 로마자로 표기될 수 있다. 중국의 여러 지방어도 예외가 아니다.

아편 전쟁 이후 구미의 선교사들은 한문도, 한자도 모르는 중국의 평범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중국 전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민중의 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7세기부터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은 선교 목적으로 베트남어를 익히기 위해서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했다. 그러한 경험 위에서 19세기 구미 선교사들은 중국의 여러 지역 다양한 지방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했다. 푸젠 샤먼에서는 184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전도를 시작했고, 1850년엔 지방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개발했다. 문맹인 다수 민중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예배를 보려면 찬송가를 함께 부르고 성경 구절을 낭송해야 하는데, 지방 사람들에게 한자는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남방의 대다수 민중은 문맹이었으며, 북방의 관화는 아예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푸젠성 동부에서 19세기 말 민난어 일종인 싱화(興化)어로 번역된 창세기. /공공부문

새로 개발한 표기법에 따라서 선교사들은 광둥, 푸젠, 저장, 장쑤 등지의 주요 지방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동시에 지식인들을 위해서 지방어의 한자 표기법을 써서 성경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은 민중 전도의 목적에 부합하는 로마자 번역 사업을 더욱 중시했다. 특히 광둥성 동부 해안의 산터우(汕头), 푸젠성의 샤먼(廈門), 대만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는 로마자 민난어(閩南語)는 1세기 이상 성경 번역뿐 아니라 다양한 출판물과 저술 활동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1852년에는 로마자 샤먼어(Romanized Amoy, 민난어의 일종) 교과서가 출판되었고, 1873년에는 신약성서가 바로 그 언어로 완역되었다. 1888년부터는 로마자 샤먼어로 교회 월간지를 출판했다. 곧이어 로마자 샤먼어로 번역된 기독교 관련 서적 외에도 생리학, 지리학, 천문학, 수학, 중국사, 이집트사, 심지어는 유교 경전도 출판되었다. 현대 베트남어가 로마자로 표기되듯, 민난어가 새로운 문자언어로 탄생했다. 덕분에 그 지방의 많은 민중이 문맹에서 탈피하여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만약 베트남처럼 로마자가 한자를 대신했다면 오늘날 중국은 유럽 이상으로 다양한 언어들이 다채롭게 전개되는 다언어의 제국이 되지 않았을까. 19세기의 로마자 표기법이 더 널리 퍼졌다면, 중국은 지금처럼 공산당 일당독재 아래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전체주의적 통일성은 유지되기 힘들었을 듯하다, 대신 독일어와 네덜란드어가 우열 없는 별개의 독립 언어로 인정되듯이 중국의 여러 지방어는 모두 독자적인 문자 표기법을 갖춘 독립 언어로 기능했을 수 있다.

대만에서 사용된 로마자 민난어(샤만어) 성경 (廈門羅馬字聖經). 로마자 표기법에 따라 번역되었다. 1933년 대만에서 출판

진(秦) 제국 이래 중국의 언어 통일 정책은 지방어를 비문화적인 사투리 정도로 격하시켜 사장하는 일종의 말살 전략 위에서 추진되었다. 그 결과 중국에서 살아가는 80%의 이중언어 사용자들은 어려서 어머니의 품에서 배우고 익힌 모어(母語)와 입말로는 창의적 생각도, 독창적 문학 활동도 할 수가 없다.

10여 년 전 광둥어 수호 투쟁에 나섰던 많은 광둥 지방의 민중은 광폭한 독재정권의 탄압 아래서 물밑으로 숨었지만, 잃어버린 모어와 입말을 찾기 위한 그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그 어떤 인간도 모어와 입말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면, 속마음이 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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