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졌던 나도, 아들을 기억한 이들 덕에 일어섰다”[이태원 참사 1주기-망각과 싸우다]
인터뷰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참여한 이유 우리>
15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참사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려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기억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들은 말한다. “진실과 기억의 힘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고.
[주간경향] 낡은 온천탕 천장에 하늘로 뾰족하게 솟은 유리창이 있었다. 따뜻한 가을볕이 유리창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온천탕에 몸을 담근 김혜영씨(65)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내 말했다. “한빛아, 너무 예쁘지?”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면 더욱 생각나는 아들 한빛…. 김혜영씨는 7년 전 방송계의 노동착취를 고발하며 생을 마감한 고 이한빛 PD의 어머니다.
김혜영씨는 최근 출간된 이태원 참사 유족·생존자 인터뷰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창비)에 저자로 참여했다. 아들의 죽음 이후 “모든 감정을 내버리고 관계를 차단하며” 살아왔던 그는 문득 “갚아야 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을 기억해준 사람들, 그리고 내 곁에 있어 준 사람들 덕분에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생각이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태원 참사 유족의 곁에 서기 위해 잠시 ‘인터뷰어’가 되어 유족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태원 참사로 동생을 잃은 송지은씨는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에 수록된 김혜영씨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너네 불쌍하다. 너네 많이 아프겠다. 끝.’ 그뿐인 것 같아요.” 이태원 참사를 잊으려는 한국사회를 향해 던진 말이었다. 방송계의 노동착취로 아들을 잃은 김씨는 지은씨가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는 ‘저자의 말’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불쌍하다’ ‘힘들겠다’ ‘많이 아프겠다’ 하고 마는 동정에서 그치지 않기를, 참사를 남의 일로만 여기지 않는 ‘공감’의 마음을 가지고 그의 곁에 단 한명이라도 끝까지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그렇다면 송지은씨도 머지않아 삶의 의미를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유족 속으로 들어가 유족의 시선으로 본 바깥을 전하고 싶었다”는 김씨를 지난 10월 20일과 24일 서울 이태원 거리와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작가기록단의 일원으로서 이태원 참사 유족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이태원 참사 뉴스를 보자마자 그 가족들부터 생각했다. 연락을 받고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했을까.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죽음을 직면할 용기가 없어 곧바로 가지 못했다. 참사 40여일이 지나 유족들이 녹사평역에 분향소를 설치한 다음날 찾아갔다. 영정 속에 너무나 젊고 예쁘고 환한 아이들이 있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모든 얼굴에 한빛이 겹쳐 보였다. ‘한빛 엄마’라는 이름으로 분향소 지킴이를 신청해 넉 달 동안 매주 3시간씩 분향소를 지켰다. 그러다 작가기록단 모집 소식을 접했고, ‘재난참사 기록학교’에서 반년간 훈련을 받은 끝에 유족 인터뷰에 참여할 수 있었다.”
-죽음을 직면하기 힘들었지만 결국 찾아갔고, 분향소를 지켰다.
“지난 7년간 간신히 가라앉혔던 감정이 확 올라올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렇지만 그들의 곁에 있어 주고 싶었고, 힘이 돼 주고 싶었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줘야만 이런 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막상 가니 유족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더라. 그게 가장 속상했다. 그래도 알고 있었다. 곁에만 있어 줘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곁이라는 건 (물리적인 거리의) ‘바로 옆’이 아니라 ‘곁에 있다는 느낌’이다. 그들은 아이가 얼마나 예뻤고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열심히 들었다. 나 또한 그랬었으니까….”
7년 전 아들의 죽음 이후 김혜영씨의 가족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2017년 이한빛 PD를 죽음으로 몰아간 CJ ENM의 노동실태가 밝혀졌고, 가족은 사측의 사과를 받았다. 그 이듬해 미디어업계 불안정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만들어졌다. 외부 활동은 그러나 대개 남편과 둘째 아들이 도맡았고, 김씨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홀로 있으려 했다. 중학교 교장으로서의 소임을 마친 뒤엔 오로지 성당만 다녔다. 집에선 늘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무기력했다.
그는 진공 상태로 하루하루 살면서 뭔가에 이끌리듯 아들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 수조 속 물고기들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했던 아들, 초등학생 시절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를 신나게 부르던 아들, 세월호 리본을 달아주며 연대와 애도에 대해 일깨워주었던 아들…. 소소하지만 아름다웠던 기억을 붙잡아 글을 썼다. 2021년 출간한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가 그 기록이었다.
-아들을 잃고 보낸 7년은 어떤 시간이었나.
“한빛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고 CJ 사과를 받은 후 ‘이제는 정말로 아들의 죽음을 인정해야 하는구나’ 싶어서 무너졌었다. 그때의 감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무너진 후, 일 외엔 모든 관계를 단절하며 껍데기처럼 살았다. 그러다 지난해 즈음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은 게 참 많았구나. 한빛 죽음의 진상규명을 위한 집회가 열렸던 상암동의 2017년 봄은 꽃샘추위로 매우 추웠는데 매번 정말 많은 청년이 와줬었다. 어디에서들 왔나 신기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들의 죽음을 기억해줬고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애쓴 청년들도 많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거다. 그동안 받기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려주고 싶어서 뭐든 하자는 마음으로 기록단에 참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내가 오히려 더 위로를 받았다.”
-어떤 위로였을까.
“나는 유족 한 사람만 인터뷰했지만, 합평 과정에서 유족과 생존자 열네 사람의 이야기를 다 읽었다. 다양한 색깔의 슬픔을 봤다. ‘저들도 힘들고 나도 힘들다’ 식의 위로는 아니었다. 그 다양한 색깔의 슬픔이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이들이 그 슬픔에서 빨리 빠져나왔으면 좋겠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뭔가를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생겨났다. 내가 인터뷰했던 지은씨는 스물일곱 살이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하더라. 내가 그동안 껍데기처럼 살며 느꼈던 무기력함이 그거였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얘기했다. 지은씨는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너무 젊고 예쁜 나이인데, 자기의 삶을 찾아야 한다고. 지은씨 같은 젊은 청년에게 그런 껍데기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은 폭력 아닐까.”
-진상 규명에 진척이 없으니 치유의 시간도 허락되지 않고 있다.
“유족들은 애도를 뒤로 유보하고 진상 규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 맨 처음 분향소에 나갈 때는 이런 기도를 했다. ‘진상이 꼭 규명되도록 해주세요. 그렇지 않고서는 저들이 애도를 할 수가 없어요. 애도를 해야만 저들이 삽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진상 규명을 위한 싸움을 하면서 그와 동시에 개인적으로 애도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진상 규명에 이토록 시간이 걸린다면 나중에 그들은 와르르 무너질 거다. 유족들이 마음 놓고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계속 천막에 있을 순 없다. 그리고 유족 한 사람, 한 사람을 부축해주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부축’이란 말을 참 좋아한다. 부축한다는 것은 곁에 있어 주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 실천을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했던 지은씨는 스물일곱 살이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하더라. 그동안 껍데기처럼 살며 느꼈던 무기력함이 그거였다. 마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지은씨 같은 젊은 청년에게 그런 껍데기 같은 삶을 살게 하는 것은 폭력 아닐까.
-‘불쌍하다’는 동정어린 시선이 아니라 ‘남의 일이 아니다’라는 ‘공감’이 필요하다고 쓴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교사로 일할 때 세월호 참사를 접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안타깝다’ 말하면서도 동정했던 것 같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내 아들이 죽을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안 했으니까. 그런데 한빛이 가고 나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나의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당했으니까 그런 말을 하지, 나는 아닌데?’ 그렇지 않다. 사회 시스템이 망가져서 생기는 문제는 다 나한테 돌아오게 돼 있다.”
세월호 2주기를 앞뒀던 2016년 3월,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세월호 피로증’을 다룬 칼럼 ‘동정피로’(2016년 3월 21일·한겨레신문)에서 동정심의 고갈은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말하며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나는 세월호 보도가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는 사람이 있어도 그가 ‘메말랐다’고 단정 짓지 않으려 한다. 또 나 역시 그러고 있는 것을 깨닫더라도 너무 자책하지 않으려 한다. 그보다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우리가 느꼈던 것은 그저 동정이었던가? 동정의 개념은 불행한 사람과 그를 지켜보는 불행하지 않은 사람의 분리를 전제한다. (중략) 유족을 동정한다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불행의 당사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들이 겪은 일이 언제든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이미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모습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뜻이다.”
유족으로서 유족의 이야기를 기록한 김혜영씨는 우리에게 이런 요청을 하는 듯하다. 지금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마음이 혹시 ‘동정’은 아닌지를 살펴보라고.
한빛이 가고 나서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은 다 내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누군가는 ‘너는 당했으니까 그런 말을 하지, 나는 아닌데?’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사회 시스템이 망가져서 생기는 문제는 다 내게 돌아온다.
-동정하는 마음을 넘어서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질문을 했으면 좋겠다. ‘불쌍하다’는 마음으로는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왜 이태원 거리에서 청년들이 압사당했을까? 진상규명 특별법이 국회에서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됐다고 하는데, 왜 아직 통과되지 않고 있지? 이런 질문들이 필요하다. ‘나만 안 당하면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결국 각자도생의 사회가 된다. 그런 세상에서의 삶은 얼마나 불안한가. 나는 중학교 교장이었다. 만약 방학 날 아이들이 ‘방학했다~’ 하며 우르르 계단을 뛰어내려가다가 사고가 났다? 이때 ‘나는 교장실에 있었고 뛰어내려가라고 한 적 없다’고 말하면 되는 건가? 그렇지 않다. 교장은 책임을 져야 한다. 형사적 책임이 없으면 도덕적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 지도자가 피해자나 국민의 입장에 서지 않으려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10월 26일은 고 이한빛 PD의 기일이다. 김혜영씨는 “10월이 이토록 아름다운 줄 예전엔 몰랐다”고 했다. 올해도 성당 앞 가로수는 나뭇잎을 떨궜고 하늘빛은 가슴 시리게 푸르렀다.
-그간 껍데기처럼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을 기억하는 책을 쓰고 다른 유족들을 만나며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는 듯하다. 앞으로의 김혜영은 어떤 모습일까.
“60대 후반 김혜영의 모습은… 지금도 껍데기가 그려지긴 한다. 가슴에 큰 구멍이 뻥 뚫려 있다. 그런데 아들을 기억해주는 분들과 함께한 이틀 전의 추모미사에서 그 구멍이 따뜻한 물로 채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연대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런 것 같다. 우리 가족의 아픔을 기억해준 그들을 나도 기억할 거다. 그리고 갚아나가겠다는 자세로 살려고 한다. 그러면 그 구멍이 좀더 작아지고 슬픔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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