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코페르니쿠스'로 불린 홍대용
‘홍대용’이란 이름을 혹시 처음 들어봤다면 그가 ‘조선의 코페르니쿠스’라고 소개되곤 하는 실학자였음을 알려드리고자 한다.
홍대용은 조선 후기 과학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로 중국을 통해 서양의 천문학을 접하고 지구자전설을 제시했다. 홍대용이 어떤 인물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 의혹1. 조선 최초로 ‘지구가 돈다’고 주장했다?
동시대 다른 학자들이 하늘의 움직임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과 달리 홍대용은 둥근 땅(지구)이 스스로 빠르게 돈다고 생각했다. 후대 연구자들은 그가 지전설을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이라 평가했다.
그 업적으로 홍대용은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선정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구가 돈다’는 생각은 홍대용이 조선 최초로 한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과도 달랐다.
조선에서 '지구가 돈다' 지전설을 처음 주장했던 사람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김석문이었다. 그는 청나라에서 활약하고 있었던 예수회 신부 쟈크 로의 ‘오위역지’에 소개된 티코 브라헤의 우주관을 접한 후부터 지전설을 주장했다.
김석문은 구형의 지구가 남북극을 축으로 1년에 366회 회전한다고 주장했다. 홍대용보다 훨씬 앞서 지전설을 내세운 것이다. 김석문은 홍대용이 네 살 때 사망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하늘에서 지구의 위치를 바꿈으로써 기존 천동설에 위협을 가한 ‘가설’이었다. 천동설에서 하늘의 중심에 있었던 지구를 지동설에서는 태양 주위를 도는 다른 행성들과 동일한 수준의 행성으로 취급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서 지구는 스스로 돌면서(자전), 동시에 태양의 주위를 돌았다(공전). 그러나 홍대용의 지전설은 지동설과는 달랐다. 홍대용은 지구가 스스로 돈다(자전)고 생각했지만 이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공전)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홍대용의 주장을 지동설이 아니라 지전설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전설은 동아시아의 전통적 기(氣) 우주론과도 달랐다. 전통적 우주론에서는 네모난 방형의 땅이 빠르게 회전하는 것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홍대용은 네모난 땅이 아닌 서양에서 말하는 구형의 땅 지구가 빠르게 돈다고 생각했다. 지전설은 서양의 우주론과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우주론을 결합해 만든 독창적인 결과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홍대용은 어떻게 지전설을 떠올리게 됐을까. 그가 혼자 고민해서 지전설이 탄생하진 않았다. 그는 중국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된 서양천문학 지식을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됐다.
16세기 이후 중국에는 북경 등지에 머무르며 천주교를 퍼뜨렸던 유럽 예수회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서구 과학지식이 유입됐다. 이들이 전해온 천문학 지식(천체 구조론)은 예수회의 종교적 입장과 대치했던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이 아니라 티코 브라헤의 학설이었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적은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을 가볍게 소개하는 수준으로 다뤘다. 그러나 홍대용은 이런 가벼운 언급에 주목해 본인의 독창적인 지전설을 탄생시켰다.
● 의혹2. 천문학뿐 아니라 서양 수학까지 연구했다?
홍대용은 천문학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다. 그는 서양의 정밀한 천문 관측을 가능하게 했던 수학도 연구했으며 직접 천문 기구를 만들기도 했다. 이런 그의 노력이 담긴 책이 수학서 ‘주해수용’이다.
이 책은 전근대의 다른 수학서와 달리 구성과 내용이 독특하다.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는데 전반부에는 곱셈과 나눗셈(승제)을 다루고 후반부에는 천문 측량을 포함한 측량 문제와 천문 의기, 음률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개념과 응용 문제를 차례로 소개한 셈이다.
그런데 주해수용은 그동안 다른 수학서에 비해 수학 지식의 수준이 낮으며 서구 수학을 소개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평가받아 왔다. 이런 주장을 하는 연구자들은 당대의 최신 서양 수학 지식이 집대성된 청나라 수학서 ‘수리정온’과 홍대용이 쓴 주해수용을 비교했다.
수리정온에는 다양한 비례법과 구면 삼각법(구 위의 삼각형을 계산하는 삼각법) 지식이 담겨있는데, 홍대용의 주해수용엔 이 내용이 빠져있다. 대신 홍대용은 후반부 측량 문제를 다룰 때 사율법(1율:2율 = 3율:4율 이라는 식에서 1, 2, 3율은 아는 수, 4율은 미지수일 때, 4율 = (2율×3율)/1율 이라는 식으로 미지수를 구하는 풀이법이다)이라 불리는 비례식을 풀이법으로 제시했다. 정말 홍대용이 서양 수학을 깊이 이해하지 못해서 사율법을 풀이로 대신 내놨던 것일까.
사실 홍대용이 다룬 사율법은 주해수용의 핵심 개념은 아니었다. 홍대용이 제시한 대표 개념은 초반부에서 제시한 승제였다. 그리고 수리정온에서는 승제와 사율의 관계를 “승제의 사이에 사율의 이치가 이미 묵묵히 들어있다. 비록 승제라고 이름 지었지만 실제로는사율이다.”라고 표현했다. 수리정온에 따르면 사율(비례식)이 곧 승제였던 것이다.
즉, 홍대용은 수학 문제 풀이의 기본 개념으로서 승제를 강조하고 이 승제를 매개로 수학 문제와 천문학 문제를 연결했다. 그리고 그런 수학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수학서를 저술한 것은 수학적 수준이 낮거나 서양 수학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 의혹3. 홍대용은 북학론의 선구자였다?
홍대용이 지전설처럼 당대 조선 지식인들이 생각하지 못한 사상을 떠올리고 주장할 수 있던 이유는 그가 중국에서 지식인과 교류하며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해외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답은 ‘예스(Yes)’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갈 수 있던 것은 아니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 기회는 조선에서 청나라에 매년 보냈던 조공 사절단인 연행사(통신사)로 뽑히는 것이었다.
연행사는 조선인이 공식적으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연행사의 핵심 인사인 정사, 부사, 서장관은 자제군관을 데리고 갈 수 있었는데 홍대용은 1765년 서장관이었던 작은아버지 홍억의 자제군관으로 연행사 행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자제군관은 공식 임무로부터 자유로워 그저 본인의 여행을 잘 기획하기만 하면 됐다. 그는 선배들이 작성한 연행록을 살펴보며 여행을 꼼꼼히 기획했다.
홍대용은 북경 도착 후 천문학자 이덕성과 함께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기 위해 남천주당을 방문했다. 당시 홍대용 일행과 천문학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예수회 신부들은 할러슈타인과 고가이슬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국가 천문기관인 흠천감의 대장과 부대장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홍대용과 이덕성은 예수회 신부들이 가진 망원경으로 태양을 관측하고 다섯 행성의 궤도 등 천문역산학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했다. 또한 홍대용은 자신의 최대 관심사인 천문 의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홍대용은 예수회 신부는 물론 중국 지식인들과도 교류했다. 그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북경에 도착한 항주의 선비 엄성, 반정균, 육비와 친해져 주자학, 양명학, 천문학 등 다양한 주제를 토론했다. 이들은 서로의 문집에 서발문을 써줬으며 조선에 돌아와서도 편지를 통해 대화를 이어나갔다.
북경에서의 경험은 홍대용으로 하여금 지전설과 같은 혁신적인 사상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됐다. 지전설이 담긴 ‘의산문답’은 연행 이후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나아가 홍대용의 연행은 후배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예수회 신부와의 대화록을 ‘유포문답’으로, 중국 선비들과의 교류는 ‘간정동회우록’으로, 북경 여행기는 두 권의 책으로 편찬했다.
이 책들은 이덕무, 박지원, 박제가와 같은 후배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홍대용의 북경 연행을 동경하게 됐고 실제로 북경을 다녀와 중국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실학의 유파인 ‘북학파’를 형성했다. 그리고 청나라의 학술과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홍대용은 북학파의 선구자로 조선의 선비가 중국의 선비들과 학문적인간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모범을 보였다. 조선 후기 한중 지식인이 만든 끈끈한 관계는 조선과 중국의 지식문화물질의 이동을 더욱 풍부하게 했고 조선에서 새로운 사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시가 바로 홍대용과 그의 지전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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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욱 기자 changwoo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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