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한양 인싸’는 이렇게 놀았지
‘서울 구경 가자스라, 한양가’ 특별전
‘서울 사람’ 개념 생긴 조선 후기
한산거사가 쓴 ‘한양가’에 담긴
명품가게·승전놀음 등 ‘도시 감성’
영상·체험물로 세부 묘사한 전시
국립한글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서울 구경 가자스라, 한양가’(내년 2월12일까지)는 조선 후기인 1844년에 쓰인 한글 가사 ‘한양가’를 바탕으로 당시 번화했던 서울의 모습을 그리는 전시다. ‘한산거사’라는 필명을 쓴 저자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한양의 풍성한 볼거리를 최초로 한글로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인기를 끌었고, 1880년에는 목판인쇄를 통해 상업용 출판으로도 이어졌다. 작품이 세상에 나온 뒤 반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 화제성과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은 스테디셀러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 들어 실제 사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실경산수화 등이 그려지고, 우리 자연 풍경과 풍속을 기록한 한글 가사가 많이 등장했다. ‘한양가’가 탄생한 배경에는 이런 분위기가 한몫했다. 당시 많은 학자들이 한양의 역사와 풍물, 세시풍속을 기록했다.
대중이 궁금해하던 한양을 ‘쏙쏙’
이른바 ‘서울 사람’이라는 개념도 이때 탄생했다. 조선 전기에는 지방 출신 양반과 노비, 군인들이 일정 기간 서울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다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조선 후기에는 경기도와 충청도 출신 양반들이 중앙 관직을 장악했고 중하층 신분 가운데서도 직업을 세습하는 중인과 서리·상인 등이 서울에 뿌리를 내렸다. 대대로 집과 일터를 도성 안에 두고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한양가’는 이런 변화 속에서 탄생한 도시 문화를 가볍고 즐거운 시선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양가’에서 소개된 흐름에 따라 서울을 여행하는 방식으로 꾸며진 전시실을 따라가다 보면 이 작품의 매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특히 양반들의 한문 문학에서 점잖게 묘사된 한양 이야기를 1부에서 보고 나면, 2부에서 펼쳐지는 ‘서울 구경’은 유쾌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산거사는 보통의 대중이 궁금해할 만한 서울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써야 하는 것’이 아닌 ‘읽힐 만한 것’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당시 도성 안에 실재하는 것 중에서 사람들이 궁금해하거나 보고 싶어 할 만한 요소들을 쏙쏙 골라 한글로 상세하게 묘사한 것이다.
서울 구경은 임금님이 있는 궁궐 안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조선 팔도에서 온 물건부터 수입품까지 가지각색의 상품을 벌여놓은 가게들, 정승과 판서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행차하는 모습과 각지의 명소 등을 하나하나 선명하게 비춘다. 모두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던 한양의 눈부신 일상이다.
이 모습들은 홍보 영상의 카메라 워크처럼 재빠르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부분들까지 하나하나 묘사돼 마치 직접 본 듯한 느낌을 준다. 궁궐의 무수리들이 문을 출입할 때 내보이는 문패를 ‘검푸른 무명으로 만든 넓은 띠’에 꿰어 비스듬히 차고 다닌다든지, 의정부 정승이 타는 가마는 의자에 깐 ‘호랑이가죽 꼬리가 땅에 슬슬 끌릴 정도로’ 가마를 낮게 메고 천천히 나아간다고 쓰는 식이다. 특히 사람들이 입고 걸친 것의 재질과 모양, 맵시를 재빠르고 촘촘하게 읽어내는 시선에서 도시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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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년 ‘한양판 브이로그’
‘한양가’에 등장하는 광경들은 한양에 간다고 해서 아무나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궁궐에 드나들며, 번화가를 훤히 꿰고 있으며, 이름난 기생과 악공들을 섭외해 한바탕 공연을 벌일 화려한 무대를 디자인하고,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합격 축하를 받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재력과 직업을 갖춘 사람이어야 했다. 즉 작품 안에서 독자를 안내하는 인물은 한양의 별천지를 오락으로 소비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가졌으면서도 제일 재미있게 놀 줄 아는 ‘인싸’였던 것이다.
왕의 경호원이었던 별감들이 무대를 차려놓고 기생과 악공을 모아 춤과 노래를 즐기던 승전놀음, 임금을 모신 행렬이 배로 다리를 이어 강을 건너가는 장면, 과거시험 같은 행사들은 어떠한가. 아무리 서울이라고 해도 매일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당시에는 평생 한양에 살았어도 작품 속 장면들을 직접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 한산거사는 마치 산책하듯 서울을 쉬엄쉬엄 돌아다니기만 해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성대한 이벤트가 펼쳐지는 곳인 것처럼 묘사한다. 오늘날 에스엔에스(SNS)에 올라오는 셀럽의 ‘일상 브이로그’처럼 서울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순간들만 압축해놓은 이야기는, 당대 조선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느끼는 장면들이 무엇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 전시는 그동안 역사 자료로 가치가 부각된 ‘한양가’를 문학 작품으로서 다시 조명하기 위해, 책 내용과 유물을 엮어 보여주는 일반적인 방식 대신 독특한 시도를 선보인다. 그중 하나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어휘를 강조하고 해설을 덧붙여 그림사전처럼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과일과 견과류를 파는 모전을 소개한 곳에는 밤, 대추, 잣, 호두, 복숭아, 포도 등의 품목 이름과 옛 한글 표기를 나열하는 식이다. 2부의 일부 공간은 유물을 배제하고 배경 영상과 단어 해설만으로 꾸리기도 했다.
최근 문화재 전시는 역사적인 의미보다 콘텐츠로서의 가치를 부각하는 흐름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이 전시에서도 다양한 영상과 체험물을 배치했다. ‘한양가’ 속의 세부 묘사를 바탕으로 장면 단위로 표현된 영상들은 관람객이 그 대목을 직접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책 속의 문장을 현대어로 풀이해 자막으로도 넣지만, 옛 가사의 말맛보다는 색채와 움직임으로 구현되는 눈맛의 힘이 더 강하다.
박물관 전시의 목표가 모든 사람이 문화재를 한눈에 알아보고, 옛 한글을 술술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것일 수는 없다. ‘매화타령’이나 ‘춘면곡’ 등 승전놀음에서 기생들이 부르던 노래를 직접 들어보고, 패널 화면을 터치하며 내 성향에 어울리는 조선시대 직업을 찾는 심리테스트를 해보면 국문학 지식이 없는 관람객들도 200년 전 서울이라는 세계를 비로소 즐기게 된다. 오히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마음에 남는 것은, 이렇게 다양한 번안이 가능할 만큼 해상도가 높은 ‘한양가’라는 원전의 힘이다.
문화재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재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재를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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