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 尹정부 3대 개혁 중 하나인데…‘숫자’ 전혀 안나온 이유는
고이즈미 내각은 4년 논의해 개혁 성공
보건복지부가 지난 27일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심의하고 발표했다. 이 국민연금 개혁 정부안은 국무회의를 거쳐 이달 말까지 국회에 제출된다. 이번 정부안의 특징은 국민연금을 개혁하는 데 핵심적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에 대해 어떠한 숫자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정부는 “연금개혁은 충분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며 “국회와 함께 공론화 과정을 통해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의 구체적인 수준을 결정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그런데 연금개혁과 관련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 문재인 정부도 구체적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숫자를 제시하며 크게 4개의 방안을 제시했었다. 이 때문에 ‘후퇴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는 과거 노무현 정부 사례에서 경험했듯이 정치 일정 때문에 국민연금 개혁안을 마련하더라도 제대로 된 논의가 불가능한 데다가, 총선을 5개월 앞두고 청년층 여론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24개 시나리오 제시됐지만, 아무런 구체적 숫자 없이 정부안 발표
윤석열 정부는 노동개혁, 교육개혁과 함께 3대 개혁으로 연금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8월 19일 복지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세밀한 의견 수렴, 치밀한 실증자료를 기반으로 초당적, 초정파적 국민 합의를 도출하기 바란다”고 말하며 국민연금 개혁이 첫 발을 뗐다.
정부 자문기구인 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는 국민연금 개혁 보고서를 마련했다. ▲보험료율 12%·15%·18%로 인상 ▲수급개시연령 66세·67세·68세로 상향 ▲기금운용수익률 0.5%포인트·1.0%포인트 제고 ▲소득대체율 현행 유지, 45%·50%로 상향 등 여러 변수를 조합해 총 24개 시나리오가 제시됐다.
정부는 이를 두고 “구체적 대안은 제시하지 않았다”며 “세대간 형평성 논의 등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안에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수급개시연령 등과 관련한 어떠한 구체적 숫자도 담지 않았다.
이번 정부안은 연금개혁을 하지 않았던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제4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보다도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건복지부는 2018년 12월 ▲현재 국민연금 제도 유지 ▲현재 국민연금 제도 유지+기초연금 40만원 ▲보험료율 12%·소득대체율 45%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50% 등 4가지 방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여당은 국민연금을 제대로 논의하지 않았다. 2019년 8월 대통령 직속 사회적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국민연금 개혁 단일안을 내놓지 못하자 연금개혁 논의가 중단됐다. 이후 코로나19 사태가 터졌고 총선이 겹치면서 문재인 정부는 연금개혁을 하지 않고 임기 5년을 마쳤다.
국민의힘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은 2021년 11월 펴낸 보고서에서 “정부가 4가지 개편안을 내놓고 사회적 합의를 요구한 것부터 보험료 인상 후폭풍 책임을 떠넘긴 셈”이라며 “정부에 이어 경사노위에서도 단일안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국회로 공이 넘어갔지만 결국 논의는 중단됐다”고 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4개의 안이 아니라 사실상 어떠한 안도 내놓지 않았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브리핑에서 ‘문재인 정부 때보다 연금개혁 논의가 더 후퇴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미래 준비를 위한 사회적 공론화 과제를 제안했다”고 답했다.
◇노무현 정부 첫 번째 국민연금 개혁안은 사장, 두 번째 개혁안은 야당이 부결
정부가 1년 3개월 간 논의해서 마련한 국민연금 개혁 정부안에서 구체적인 숫자를 내놓지 않은 것은 정치 일정을 고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여야는 정기국회가 끝나면 ‘총선 모드’로 돌입하고, 내년 4월 10일 총선 전까지 중요한 논의를 하기 힘들다. 총선이 끝나면 21대 국회는 한 달 정도만 남는다. 정부가 애써 국민연금 개혁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더라도 사장되고 22대 국회에서 처음부터 다시 논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정부에서 국민연금 개혁을 추진할 때도 이런 일이 있었다. 정부는 2003년 10월 소득대체율을 50%로 낮추고, 9%인 보험료율을 15.9%까지 상향한다는 개혁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여당이 분열되며 열린우리당이 만들어지고 대통령 탄핵까지 겹치며 국민연금 개혁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정부가 국민연금 개혁안을 마련하더라도 국회 논의과정에서 전혀 다른 안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보험료율을 12.9%로 인상하고 소득대체율을 50%로 낮추는 정부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현 국민의힘)과 민주노동당은 보험료율 9%·소득대체율 40%라는 수정안을 제출하고 정부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시켰다. 결국 정부는 이 수정안을 수용해 국민연금 개혁을 완료했다.
현재 국회에서는 168석을 가진 더불어민주당 협조를 받지 않으면 연금개혁이 불가능하다. 먼저 정부안을 내놓기보다 민주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안을 함께 마련하는 것이 먼저일 수 있다.
◇연금개혁하면 청년층 여론 악화 우려…총선 5개월 앞두고 악재
국민연금 개혁의 핵심은 보험료율 인상이다. ‘소득에서 더 많은 돈을 가져가겠다’는 방안은 수십년간 적은 보험료를 내 온 중장년층보다 앞으로 보험료를 많이 내야 하는 청년층에게 더 큰 타격을 준다. 자연히 국민연금을 개혁하는 데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복지부에 따르면 청년층은 집단심층면접(FGI)에서 “개혁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청년층 부담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것은 수용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앞서 정부는 지난 3월 노동개혁의 하나로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했다가 ‘주 69시간 근무제’ 논란을 일으키면서 청년층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샀다. 윤 대통령이 나서서 보완하라고 지시했고, 그 뒤 7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수정된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정부는 보험료율을 얼마나 올릴지 수치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세대별 형평성을 고려해 보험료율 인상 속도를 연령 그룹에 따라 차등을 추진한다”는 방향은 제시했다. 보험료율이 정해지면 40~50대는 인상을 빠르게 진행하고 20~30대는 천친히 높이는 방식이다. 총선이 5개월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청년층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1년 만에 연금개혁 마무리한 프랑스…한국은 국회 건너뛸 권한 없어
정부는 이번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내놓으면서 연금 제도의 틀을 바꾸는 개혁이 원래 단시일 내에 마무리되는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스웨덴은 14년, 영국은 12년, 일본은 4년 걸렸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이런 설명에 부합하지 않는 사례는 최근 연금개혁에 성공한 프랑스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첫 번째 임기에서 복잡한 연금 제도를 단일화하려다 포기했다. 지난해 4월 연임에 성공하자 정년을 64세로 늦추고, 연금을 100% 받기 위해 보험료를 내야 하는 기간을 기존 42년에서 43년으로 늦추는 새로운 연금개혁안을 제시했다.
프랑스의 강성 노조는 파업을 벌이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연일 대규모 집회를 벌였다. 야당도 반대했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국민의회(하원) 표결을 생략하고 연금개혁을 강행했다. 그 결과 재선 성공 11개월 만인 지난 3월 연금개혁에 성공했다. 정부가 긴급한 상황에서 의회 동의 없이도 입법이 가능하도록 한 프랑스 헌법 49조3항을 이용한 것인데 한국에서는 불가능하다. 연금을 개혁하려면 야당 등 여러 이해관계자와 협의를 거쳐야 해 자연히 오랜 시일이 걸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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