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꿈꿨던 ‘1004호’는 지옥이었다…820일 ‘전세사기’ 분투기 [Books]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떠니, 집주인이 아니라 관리소장 번호였다. 소장은 왜 본인한테 전화를 거냐고 짜증을 냈다. ‘전세 사기’였다.
신간 ‘전세 지옥’은 평범했던 1991년생, 조종사가 꿈이었던 저자 최지수씨가 전세 보증금을 받기 위해 발로 뛰어다닌 820일간의 기록을 꿰맨 책이다. 집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날부터 시청, 법원, 경찰서, HUG, 주거복지재단을 오가며 경험한 절망의 날들을 적었다. 전세 사기 참극이 한 개인을 어떤 삶으로 내몰았는지를 기록한 시대 증언록이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자. 저자 최씨는 월세 35만원을 아껴 종잣돈을 만들고 싶었다. 파일럿 꿈을 품고 천안공단 내 일본계 회사에 취직했지만 ‘기숙사’는 지옥이었다. 녹물 때문에 샤워도 기다려야 했고, 바퀴벌레 천국이었다. 2인 1실. 일부 선배는 팀 상사와 한 방을 썼다. 1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고 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 알아보니, 인근 월세 시세는 당시 35만원. 전세로 방향을 틀고 20군데 집을 보러 다녔다. N부동산 사장은 말했다. “집이 1004호거든? 봐봐, 이름부터가 ‘천사’잖아. 여기서 살면 매일 천국에서 사는 기분일 거야.” 중개수수료 29만원 받아먹자고 사장이 그때부터 이 비극을 설계한 걸까.
그 빌라는 제2융권 근저당 설정액이 33억원이었다. 부동산 사장이 주장한 건물 감평가는 70억원. 사장은 1억원짜리 공제증서까지 보여줬다.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공제증서는 공인중개사 과실이 인정된 경우만 효력이 있었다. 과실이 인정되더라도 해당 부동산에서 피해를 입은 복수의 세대가 1억원을 나눠갖는 식이었다. 공제증서는 그냥 ‘이면지’였다. 게다가 그 즈음, 저자 최씨는 헝가리 회사 취직 때문에 전 근무처에서 퇴사한 터였다. 상황이 더 꼬여버렸다.
배당요구 종기일이 되기 전 배당요구 신청서를 제출하던 날, 지방법원 경매계 직원에게 묻자 답변은 차가웠다. “그건 건물주와 채권자에게 물어보세요.” 대출 만기일이 도래했고 대출금 4650만원을 갚아야 했다. 연리 10.6% 카드론으로 3300만원을 땡겼다. 연이자는 대략 330만원. 월세 35만원 아끼자고 빌라 전세를 택했던 2년 전 자신을 저주했다.
긴급생계지원금을 신청하려면 전세사기피해확인서를 발급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확인서는 무이자나 저금리 전세 대출 신청 용도로만 발급됐다. 피해를 입증하려면 매각물건명세서, 배당표, 임차인확약서, 소득사실증명원 등 10종에 달하는 서류를 내야 했다. 동네 주민센터에 서류를 갖다냈던 날, 손에 쥐어진 건 진짜로 긴급했던 현금이 아니었다. ‘신라면 20개’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법무사 사무실과 변호사 사무실에서 보낸 우편물도 쌓였다. ‘무료 상담’이란 문구에 혹해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10만원을 내야 상담해준다고 했다.
어쨌든 3차 경매 끝에 같은 빌라의 피해자 전 세대가 낙찰됐다. 총 낙찰가는 감평가의 절반인 25억4000만원. 근저당 33억원에 못 미쳤다. 건물주 통장엔 ‘1000원’ 남아 있었다. 소액임차인 최우선변제금으로 2000만원은 받았지만 원금(전세금) 5800만원을 생각하면 택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4400만원’에 집을 낙찰받은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인도명령, 강제집행, 불법점유….’
물론 새 집주인의 잘못은 없다. 그러나 이사지원비 20만원을 깎으면서도 2주 안에 집을 비우고, 입주청소에 준할 정도로 깨끗하게 비우라는 요구는 저자에게 서글펐다. 저자는 쓴다 “새 집주인에게 목이 땋인 물고기 신세였다. 내게 유리한 조건이 거의 없는데도 고개 숙여 감사해야 했다.”
대개 실화를 다루는 작가들은 어두운 이야기의 주변을 겉돌며 책을 쓴다. 저자 최씨는 자신이 이 책을 쓰게 되리라고 생각하지도, 준비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전세 사기에 휘말렸고 어둠의 중심부에서 이 책을 썼다. 준비되지 않은 작가의 시대 증언록, 그게 이 책의 참된 가치다.
“세상 누구도 처음부터 전세 사기 피해자가 될 운명을 안고 태어나지 않았듯, 나에게도 보통의 삶이 있었다”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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