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문명의 전령사’, ‘씽가’미싱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예원학교 쪽으로 올라가다보면 고풍스러운 4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 나온다. 1926년 무렵 미국 싱어 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 가 신축한 경성 본점이다. 2008년 국가등록문화재가 된 내력있는 건물이다. 원래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인데, 1969년 신아일보에 매각된 이후 4층으로 증축했다.
1938년 2월17일 오후 조용하던 정동길이 분주해졌다. 이 건물에서 일하던 싱거회사 경성본점 직원들이 ‘차별대우’를 시정하라며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부(경성府)내 정동정(町)1번지 미국 ‘씽-거’회사 경성중앙점 사원 59명은 그 회사 서기장 미국인 크로포-드씨가 동양인을 몹시 차별대우함에 분개하야 17일 오후4시부터 사원대회를 열고 일(一), 서기장 크로포-드와 존스 양씨는 (인종적 차별을 하는)정신을 개선하라 일(一),정신을 고칠 수없거든 미국으로 돌아가라 일(一),독일인비서 치크라 양에 대하야 주의시키라 일(一),식당과 변소에 위생적 설비를 하라….’(‘기계는 수입두절 사원들은 결속동요’, 조선일보 1938년2월19일)
독일인 여비서 치크라가 조선인 직원과 세면기를 같이 쓴 관계로 얼굴에 종기가 생겼다고 크로포드사장에게 일러바치면서 시작됐다. 크로포-드는 일반 사원에게 서양인 전용의 세면대를 절대로 쓰지말라, 만약 쓰면 퇴직시킨다고 윽박질렀다. 조선인 직원들은 이런 차별 대우에 항의한 것이다.
◇분점 260여개에 사원 3000여명
조선인 직원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일자리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때문이었다. 6개월전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 정부는 위체관리법과 수출입품임시조치법을 시행했다. 이때문에 미국에서 생산된 재봉틀을 새로 수입할 수 없고,이미 수입된 제품만 처분하게 돼 회사가 철수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앞의 신문 기사는 ‘이 상회는 조선과 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총본부로 관하에 분점이 260여개가 있고, 사원이 3000여명에 달하는 큰 회사’로 소개했다.
미국 아이작 메릿 싱어(1811~1875)가 1851년 자신이 발명한 재봉틀로 특허를 얻어 설립한 회사가 싱어다. 싱어는 1920년대 이전 미국과 유럽뿐 아니라 러시아, 동유럽, 동남아, 서남아, 남아프리카 등까지 진출해 한때 재봉틀 시장의 90%(1912년)를 차지할 만큼 급성장했다. 재봉틀하면 싱어를 떠올릴 만큼, 재봉틀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싱어는 재봉틀을 ‘문명의 전령사’로 포장했다. 재봉틀은 가정용 기계로는 처음으로 대량판매된 상품이었다.
싱어 미싱은 조선에서도 엄청난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1936년 조선의 수입품 중 기계류는 492만3000원인데, 싱어 미싱이 대부분을 차지했다.(‘조선무역사정 중요품별가액’, 조선일보 1937년1월8일)
◇미싱은 ‘소잉 머신’의 일본식 표기
재봉틀은 미싱이란 말로 더 친숙하다. 일본인들이 ‘소잉 머신’(Sewing Machine)에서 소잉을 빼고 ‘머신’을 ‘미싱’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도 그대로 따라썼다. 미싱은 1960~1970년대 혼수품 1호로 통할 만큼 집집마다 갖추고 있던 상품이다. ‘꽃님이 시집갈 때…부라더 미싱’ ‘현대 가정의 미싱 부라더’같은 선전문구를 단 신문광고가 자주 실렸다. 미싱은 1877년 김규식 부친인 김용원이 일본에 갔다가 구입해 가져온 것이 최초로 알려져있다. 1896년 이화학당 교과목에 ‘재봉과 자수’가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때쯤이면 재봉틀이 꽤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외교원’ ‘여교사’가 집집마다 다니며 미싱 선전
싱어는 1905년 경성에 지점을 설치하면서 재봉틀 시장을 장악했다. 당시 뉴미디어인 신문에 광고를 실어 상품을 선전했고 방문판매와 할부판매를 통해 시장을 공략했다.예전 화장품이나 요즘 정수기 판매와 비슷한 당시로선 선진적인 마케팅, 판매 방식을 도입한 셈이다. 싱어사는 조선에서 방문판매원을 ‘외교원’, 제품을 안내하는 여직원을 ‘여교사’로 불렀다. 대개 두 사람이 팀을 이뤄 방문했다.
싱어는 또 전국에서 ‘재봉,양재 강습회’를 열어 싱어 미싱을 알리고, 이미지를 높이는 전략을 썼다. 1920~1930년대 신문에는 전국에서 열리는 ‘재봉 강습회’소개 기사가 자주 실렸다. 싱어가 강사를 파견하고 후원하는 형식이었다.
◇월부판매로 공략
월부판매는 싱어만의 판매 전략으로 1907년 조선에서도 도입했다. 미싱은 가격이 비쌌다. 1937년 기사를 보면 싱어 미싱 ‘손틀’은 200원, ‘발틀’은 270원이었다. (’미싱價도 껑충, 15원씩 폭등’,조선일보 1937년6월25일) 여기서 가격을 15원씩 올린다는 예고 기사였다. 보통학교 교사 초임이 35원, 당시 신종 직업인 백화점 여직원이 월 15원에서 40원 정도 받던 시절이었다.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90쪽)
몇 달치 월급을 바쳐야 살 수 있는 고가 상품을 사게 만드는 방법이 매달 소액을 나눠내는 할부판매였다. 그런데 부작용도 심했던 모양이다. 싱어는 월부금을 제때 안내는 구매자들을 상대로 이미 판매한 재봉틀을 압류하는 소송을 남발했다. 경성지방법원이 1925년 상반기 외국인이 관련된 민사소송사건을 살펴봤더니, 서양인이 청구한 36건 소송중 35건이 싱어사(社)가 조선인 구매자를 상대로 제기한 미싱 차압청구소송이었다.(‘外人대 조선인 소송내용’, 조선일보 1925년7월16일) 기사는 ‘그 회사에서는 재봉기계를 소위 월부로 팔았다가 그 값을 거의 다 내고도 마지막에 이르러 지불기일만 떨어지면 그와 같이 조금도 용서없이 차압청구를 하야 기계를 빼앗아 가는 것이라더라’며 싱어사의 엄격한 소송제기를 비판적으로 봤다.
◇싱어 미싱 시장 지배, 중일전쟁 후 일본산 점증
싱어 미싱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조민영 논문에 따르면, 1919년~1940년 조선에서 판매된 싱어 미싱은 21만8221대이다. 1919년 1만8938대로 시작,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엔 2만5246대로 정점에 올랐다.
1935년부터 일본산 미싱의 수입이 조금씩 늘었다. 특히 파인 미싱을 만들던 파인재봉 기계제작소가 1935년 회사 이름을 제국 미싱으로 바꾸고 내놓은 ‘자노메’(蛇の目)미싱이 인기를 누렸다. 당시 신문 광고에도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품질을 따라잡긴 어려웠던 것같다.
1936년 평북 정주(定州)에 사는 한 독자가 공개 질의를 했다. ‘박래품(舶來品)과 국산 미싱중 어느 것이 조선 내에서 다량판매되며, 국산 미싱회사중 어느 것이 제일 신용 있으며 품질이 우량합니까.’ 여기서 국산 미싱은 일본산을 가리킨다. 답변은 이랬다. ‘최근에 조선에 진출하고 있는 재봉기계는 파인미싱, 사지목(蛇之目)미싱 등 2,3종이 있으나 가격에 비하야 품질이 박래품과 동등한 것이라고 인정하기 곤란한 모양입니다.’(’질의’, 조선일보 1936년 8월23일)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해 외국산 제품 수입을 규제하면서 싱어 미싱은 철수하고 일본산 제품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됐다. 싱어는 해방 후 다시 한국 시장에 복귀했다.
◇참고자료
고선정, 근대 재봉틀과 여성의 상품문화연구, 상품문화디자인학연구 제72집, 2023, 3
조민영, 근대 재봉틀의 보급과 생활경제의 변화, 연세대 석사학위논문,2021
최자혜, 경성백화점 상품박물지, 혜화 1117, 2023
설혜심, 소비의 역사,휴머니스트, 2021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소명출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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