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안 보여도 큰일 아냐” 시각장애 사나이의 고흐 그림 감상법 [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앞 못 보는 친구와 미술관에 가면 생기는 일
안마사에서 사진가로,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씨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중요하지 않아”
전맹인과 미술관람, 존재만으로 ‘그림 보는 눈 틔워’
보이든 보이지 않든, 서로 만나면 세계 넓어져
이 세계는 탈선의 루트로 가득한 즐거운 황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곁에 있는 덕에 우리 눈의 해상도가 올라가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로 그림을 보여주는 사람은 우리가 아닌 시라토리 씨인지도 몰랐다.” -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가다’ 중에서

▲전맹 미술 관람자 시라토리 겐지. 신간 ‘눈이 보이는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가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매년 수십번씩 미술관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 전맹 미술 관람자 시라토리 겐지. 시라토리 씨와 함께 미술관에 가본 사람들은 입을 모아 증언한다.

“시라토리 씨랑 작품을 보면 정말 즐거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미술 작품을 본다고? 어떻게?

어릴 적부터 시라토리 씨는 일상생활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큰일이구나, 딱해”라며 그를 동정하는 어른들이 더 이상해 보였다. 부족한 부분을 메꿔서 비장애인에 가까워져야 한다는 어른들의 선입견에, 시간이 갈수록 의문이 생겼다. 성인이 되어 시라토리 씨는 흰 지팡이로 주위를 탁탁 짚으면서 전철을 이용해 다녔다. 어느 밤에는 술을 마시다 취해버리는 바람에 집에 가는 길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시라토리 씨는 그 또한 큰일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대학 시절, 여자친구가 미술관에 데려가 ‘다빈치의 인체해부도 특별전’을 그에게 말로 설명해 주었다. 이런 세계가 있다니, 시라토리 씨는 가슴이 설렜다. 골격, 근육, 인체의 구조는 안마사 자격을 지닌 시라토리 씨도 잘 알았다.

어느 날, 그는 직접 미술관에 전화를 걸었다. “저는 전맹이지만 작품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안내를 해주면서 작품을 설명해 주었으면 합니다.” 줄기찬 그의 요청에 마침내 미술관의 문이 열렸다. 고흐 전시회를 처음 안내한 미술관 직원이 시라토리 씨에게 허리 숙여 고맙다고 인사했다.

인상파 작품 전에서 미술관 직원은 처음엔 “호수가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가 정정했다. “죄송해요. 노란 점이 있는 걸 보니 호수가 아니라 들판이네요. 지금까지 들판을 호수라고 믿고 있었어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곁에 있으면 평소에 사용하던 뇌의 취사선택 기능이 꺼지고, 우리의 시선은 작품 위를 자유롭고 섬세하게 헤맨다.

이를테면 시라토리 씨는 안내자의 눈의 해상도를 높여주고 작품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해주는 장치였다. 서로 몸의 기능이 확장되고 연결되는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아리오와 시라토리 겐지와 아름다운 미술관 여행기 ‘눈이 안보이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장애와 미술을 관통하는 시라토리 겐지의 전복적 시선이 압도적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가다’는 아름답고 혁신적인 책이다. ‘장애인 서사는 어둡거나 계몽적일 것이다’라는 편견을 단변에 깨트린다. 시라토리 씨를 만난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 씨는 시각장애인 곁에서 그림을 ‘들려주면서’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 눈뜬다. 그림에 눈을 뜬 것은 전맹인 시라토리 씨가 아니라 그림을 안내하던 가와우치 씨였다. 의연함과 의외성으로 가득한 한 남자의 보폭에 맞춰 걷다 보면, 이 세계는 탈선의 루트로 가득한 즐거운 황야가 된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상관없이, 누군가를 만나면 세계가 넓어진다’는 이 유니크한 ‘시선의 단독자’를, 책을 쓴 가와우치 씨와 함께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문득 궁금합니다. 시라토리 씨에게 ‘큰일’은 무엇인가요? 가와우치 씨에게 ‘큰일’은 무엇인가요?

“(시라토리) “눈이 보이지 않아서 큰일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동시에 ‘눈이 보여도 큰일은 있지 않아?’라는 의문이 솟아나죠. 저는 스스로 “큰일이야.”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인생은 큰일투성이야.”라고 말해버리면, 대부분의 일들이 ‘큰일’이라는 범주에 들어갈지 모릅니다. 그와 반대로 “큰일은 아냐.”라고 단언하면 전부 일상다반사가 되지 않을까요.

애초에 저는 시력의 유무를 기준으로는 뭐가 큰일인지 모르기도 합니다. 그런 저도 성범죄나 자연재해 피해는 ‘큰일이네.’라고 느끼는데, 그들의 힘듦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겠지요.”

“(가와우치)저에게 쉬운 일을 시라토리 씨는 못 한다는 것을 알고 저도 모르게 ‘큰일이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라토리 씨에게서 당사자가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큰일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지요. 저에게 큰일이란 다른 사람과 장단, 페이스를 맞추는 겁니다. 회사원은 제게 정말 ‘큰일’이었습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지금은 그다지 큰일이 없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곁에서 내 눈의 해상도가 높아지는 경험은 정말 신비롭더군요. 내가 그를 안내하는 게 아니라 그가 나에게 그림을 안내하는 것 같았다고요. 시라토리 씨에게는 ‘전맹’임에도 어떤 초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가와우치)시라토리 씨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와 말에도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초능력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보완하면서 각자의 능력을 끌어낸 거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 곁에 있다 보니 꼼꼼히 작품을 관찰하게 됐어요. 여느 때 같으면 놓쳤을 세부 묘사에도 눈길이 머무르고, 배경에 관해서도 생각해 봤죠.”

색과 빛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전해지는지 알 수 없지만, 가와우치 씨는 눈과 말을 사용해 그림의 윤곽을 묘사했다. “한 여성이 강아지를 안고 있는데 강아지의 뒤통수를 유독 자세히 보네요. 개한테 이가 있는지 보는 건가. 여성은 슬퍼하면서 고개를 숙인 것 같기도 해요.”

▲보나르의 작품 ‘강아지와 여자’.

말로 표현하면서 점점 생각의 문이 열렸다. 다른 점이라고는 시라토리 씨라는 존재 밖에는 없었다. 시라토리 씨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어떤 방인가요? 작품은 몇 점이나 있나요? 그 뒤에는 ‘응응’하고 맞장구를 치고 가끔 질문할 뿐이었다.

우리가 전자파나 미생물을 본 적 없으면서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시라토리 씨도 저녁노을과 사과는 붉은색이라고 이해했다. 시라토리 씨의 대화형 감상법은 MoMA에서 고안한 방법과 매우 비슷했다. 함께 작품에 관한 간략한 묘사를 거듭하는 것, 의견을 하나로 정리하지 않고 답이 나오지 않거나 모순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공유하는 것.

가상의 시라토리 씨를 상상하면서 혼자 감상해도 훨씬 꼼꼼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도움을 주는 쪽과 받는 쪽이라는 관계를 뒤집는 새로운 경험이다. 그가 아는 세계는 우리가 모르는 세계 그 자체니까.

-시라토리 씨는 어떻게 ‘전맹자인데 미술 관람을 하고 싶다’는 요청을 거절당하면서도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시라토리)상대방이 곤란해하거나 거부하는 경험은 어린 시절부터 겪어왔어요. 전맹인 제게는 지금도 일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미술관의 거절은 애초에 예상을 벗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다행히 전화기 너머 직원은 매우 당황했지만 거절한다는 느낌을 주진 않았어요.”

▲시라토리 겐지는 극도의 약시로 태어나 색을 본 기억이 거의 없고 색은 개념적으로 이해한다고 했다.

-눈은 가늘게 뜨고 흰 지팡이를 들고 있는, 시라토리 씨는 약간 마법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초월자 같은 느낌이 듭니다. 때 묻지 않은, 찌들지 않은 느낌이랄까요. 본인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시나요?

“(시라토리)애초에 저는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보다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가 저를 ‘초월자 같다.’라고 생각해도 ‘그것도 좋네.’라고 생각할 뿐 딱히 어떻게 보였으면 좋겠다고 바라지 않습니다.

(가와우치) 시라토리 씨가 때 묻지 않은 느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시끄러운 세상사나 주위 사람들의 분위기에 별로 휩쓸리지 않는 사람 같긴 합니다. 예를 들어 시라토리 씨는 일과 관련한 정말 대수롭지 않은 대화에서도 자신이 싫은 건 싫다고 분명하게 의사를 밝히는데, 그만큼 그가 강한 사람이라는 증거지요. 내면에 ‘자기의 상’이 뚜렷하게 있는 사람입니다.”

-시라토리 씨! 마사지사, 전맹 미술 관람자, 사진가 등 여러 ‘부캐’로 사는 게 즐거우신가요?

“(시라토리)현재 저는 ‘전맹 미술 감상자·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마사지사는 아니죠. 올해는 ‘전맹 미술 감상자’로 약 20곳에서 감상회 진행을 맡았고, ‘사진가’로는 한 예술제에 참가한 정도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흘러가는 대로 운에 맡기면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의 다양한 현재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봄에는 가와우치 씨가 감독을 맡은 다큐멘터리 영화 ‘눈이 보이지 않는 시라토리 씨, “예술을 보러 가다’의 무대 인사를 다니느라 바빴어요. 제가 스스로 무언가를 쟁취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좋아 보이는 길을 선택하고 있어요.”

-가와우치 씨는 시라토리 씨에게 어떤 새로운 점을 배웠나요?

“(가와우치)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시라토리 씨 집을 방문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불을 켜지 않는구나, 요리는 이런 식으로 하는구나… 예상치 못한 곳에 예상치 못한 물건이 놓여 있는 걸 보고,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 편리한 배치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편리한 배치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스페이스 설치 미술 ‘꿈의 집’을 체험 중인 시라토리 겐지.

시라토리 씨는 몇 년 전까지는 방에 불을 켜고 지냈다. 전맹이지만 보통의 생활인처럼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 하지만 얼마 전부터 전맹이 불을 켜지 않는 건 당연하잖아,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저는 두 분의 대화를 통해 ‘본다’는 행위는 매우 다층적이며, 우리의 시각과 기억, 뇌의 정보 능력은 제각각 맹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분에게 ‘본다’ ‘시선’ ‘시야’ 이런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요?

“(시라토리)’본다’의 의미는 계속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집에서 차를 마실 때는 잔을 들고 입으로 마시는 신체의 움직임을 봅니다. 그때의 시각은 저에게 없어도 괜찮아요.

(가와우치)저는 시라토리 씨에게서 ‘호수로 보이는 들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본다’는 행위가 불완전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뒤로는 보는 것에 대한 과신을 멈추고 ‘공간 속의 경험’ 그 자체를 즐겨보기로 했지요. 몸으로 느끼는 정보가 시각 정보보다 더 생생하고 진실합니다. 온라인 회의로는 화면 너머에 있는 사람의 분위기와 인품을 알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지요.”

-미술 관람에는 ‘적당히 무지한 상태가 필요하다’는 말이 신선했습니다. 문화재 관람에 있어서 한국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사랑하게 된다’라는 관념이 퍼져있었거든요. 시라토리 씨는 ‘안다’ 보다 ‘모른다’에서 더 많은 잠재력을 봅니까?

“(시라토리) ‘무지한 상태’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의 핵심은 중립적인 자세로 마주할 수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무지한 편이 더 좋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아요. ‘안다’와 ‘모른다’ 중 어느 쪽에 잠재력이 많을까 하는 논의 역시 ‘전맹자’인 저에게는 성립할 수 없는 질문이지요.”

-장애는 사회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도 완전히 새로운 발상이었어요. 시라토리 씨 스스로가 빨래를 잘 못 개고 마사지를 못하는 장애인이 처음엔 이상했다는 고백도 진솔하게 들렸습니다. 장애인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사회화’된다는 걸 자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시라토리)십대 후반이 되어 한 가지 모순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 평범하게 대해주면 좋겠다.’라는 주장과 ‘장애가 있으니까 특별히 생각해 주면 좋겠다.’라는 주장. 그 무렵부터 의학(학문)이 말하는 ‘장애’ 그리고 행정정책이 말하는 ‘장애인’을 각각의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게 됐죠. 그리고 스물두 살쯤에는 ‘장애인은 만들어진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 같습니다.”

▲’디스림픽 2680’ 구로베시 미술관에서 개최한 전시회 작품 앞에 선 시라토리 씨. 그는 난해한 작품, 현대 미술을 좋아한다.

-시라토리 씨,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와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았을 때 어땠습니까?

(시라토리) 다빈치의 인체 해부도가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전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가본 고흐의 전시회도 농부의 소묘 등이 인상에 남았는데, 그 또한 친구가 “그런 걸 좋아해.”라고 말했기 때문이죠.”

-이 책을 읽고 “아들의 시각장애를 알고 강점만으로 싸우는 걸 그만두었다”고 한 ‘마이노러티 디자인’의 사와다 도모히로가 생각났어요. 그는 ‘일이란 내어주고 내어 받으며 서로의 돌봄을 포개어 나가는 것’이라고 했지요. 민폐는 사회관계 자본이라고요. 아웃사이더들의 사회적 시력으로 우리 사회는 더 나아갈 수 있다고요. 책에서 ‘미확인 민폐 물체’라는 단어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웃었습니다.

“(가와우치) 일본 사회에서는 어린아이에게도 타인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주입합니다. 얼마나 강하게 주입하는지 타인에게 기댈 생각을 하지 않거나 기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사람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요?

혼자서 여기저기 잘 다니는 시라토리 씨라 해도 전철을 타고 처음 가보는 곳에 갈 때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어요. 기대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저 역시 제가 잘하지 못하는 것이나 내키지 않는 것을 해야 할 때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든요.

부탁하는 모습이 훨씬 더 아무렇지 않은 사회가 되길 바라요. 그래야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빠져나가 누구도 없는 황야로 나갈 수 있지요. 그때 시라토리 씨처럼 자기 감각으로 걷는 느낌을 알게 될 겁니다.”

▲안마사로서 인상 깊게 기억하는 다빈치의 ‘인체해부도’.

-우리 인생에는 제 각자의 미지의 황야가 존재한다는 말도 참 좋았어요. 아슬아슬한 탈선이라면 가령 어떤 것일까요?

“(가와우치)떠오른 것을 해보자는 사고방식으로 시라토리 씨의 스타일과 일맥상통합니다. 저는 시라토리 씨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현재 일본의 33개 극장에서 상영 중입니다. 극장용 영화를 만든 것도, 배급하는 것도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었죠. 그야말로 안전지대에서 빠져나가 도전하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예전에 중증 장애가 있는 사람이 휠체어로 버스에 타는 것조차 “민폐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보다 훨씬 평범한 일이 됐지요. 그런 변화 역시 버스에 타고 싶다고 처음 손을 든 사람들 덕분이죠. 우리도 일상에서 ‘이건 안 되겠지.’라며 삼가는 경우가 있는데, 용기를 내어 한 발 탈선했을 때 세상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움을 준다, 도움을 받는다,라는 이분법을 어떻게 허물 수 있을까요? 저성장 사회를 사는 일본에서 ‘돌봄의 예술’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요?

“(시라토리) 단순하고 난폭하게 단언하면, ‘도움을 준다 / 도움을 받는다’라는 구도는 허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그런 관계가 필요한 상황이 있기 때문이지요. 제 경험에 기초해 이야기하면, 장애가 있다고 해서 그런 가치관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거리에서 장애인을 만나면 “안녕하세요, 괜찮으시면 저기까지 함께 가도 될까요?” 정도로 인사해 달라고 했다. 전철에서 자리를 양보할 때도 ‘여기 비어있어요’라고 해야 부담을 주지 않는다고.

▲왼쪽부터 가와우치 마리오와 시라토리 겐지. 아사다 지로 상을 수상한 논픽션 작가 가와우치는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라는 책에서 예술, 인간, 사회, 장애, 정상성 등의 이슈를 탐색한다.

-가와우치 씨는 사진가 시라토리 씨가 찍은 사진이 맘에 듭니까?

“(가와우치)시라토리 씨는 산책하면서 셔터를 누릅니다. 걸으면서 꽤 자주 셔터를 누르기 때문에 마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같은 사진들이 정말 많이 찍힙니다. 각각의 사진은 삐뚤어지기도 하고 빛이 신기하게 반사되기도 해서 눈이 보이는 사람은 찍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답니다.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수없이 찍는 행위가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정연두 작가의 ‘와일드 구스 체이스’가 그런 매력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시라토리 씨는 빛이 없는 상태에서 사는 삶을 비장애인들에게 어떻게 소개해 주고 싶으신가요?

“(시라토리) 실례가 되는 답변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소개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저와 눈이 보이는 기자님의 차이에 관해, 그리고 눈이 보이는 기자님과 기자님의 친구와 저의 인생이 어떻게 다른가에 관해.

저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생각이나 전맹이라서 겪을 수 있는 경험이 있겠죠. 그래도‘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왜 눈이 보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해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바로 저에 대한 소개입니다.”

-시라토리 씨는 정말 보이는 세계로 들어올 생각이 없습니까?

“(시라토리) 어린 시절에는 보는 것을 동경하기도 했고, 보이는 쪽이 좋다는 가치관을 의심 없이 믿기도 했죠. 이제는 그간 경험으로 몸에 쌓인 가치관을 얼마나 버릴 수 있느냐에 따라 시각을 얻고 싶은지가 정해질 것 같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건 현실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제는 자율주행 자동차가 꽤 현실로 다가왔지요. 그러니 절대로 보이게 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금은 외려 귀찮을 것 같아서 보이는 쪽을 선택하지 않을 듯합니다.

▲색과 빛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시라토리 씨에게 전해지는 지 알 수 없었다. 작품은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시라토리 씨, 우리는 어떻게 당신의 세계와 가까워질 수 있을까요?

“(시라토리)일본 인구 1억 2,000만 중에 시각장애인은 대략 30만 명입니다. 그 30만 명에는 약시와 중도 실명, 중복 장애 등이 포함되어 있어 꽤 폭이 넓습니다. 맹학교, 당사자 단체 등은 비교적 접근하기 쉽겠죠. 만약 말씀하신 ‘당신’의 의미가 별난 사람, 특징적인 사람이라면 실제 수도 적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스스로가 별나고 심술궂은 사람이라고 자각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공동체도 없으니 저 같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별나고 심술궂은’ 시라토리 씨가 ‘장애인은 이럴 것이다’라는 우리의 밋밋한 사고에 균열을 내고 있다. ‘수용’을 바라거나 ‘도움’을 바라는 모습이 아닌, 제3의 시력을 지닌 적극적인 표현자의 모습으로. 앞날이 보이지 않는 우리 인생을 위한 눈밝은 가이드의 모습으로.

오랫동안 시라토리 씨를 관찰해 온 가와우치 씨는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가다’ 책의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다. 될 수 없는데 되자고 생각하며 얄팍한 폼을 잡는 그런 사회는 그래서 불쾌하다. … 그저 함께 있으면 웃는다는 것, 그걸로 충분했다. 끝까지 파고들면 모두 그것으로 집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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