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아재의 건강일기] (30-끝) Stay hungry. Stay foolish

김고금평 에디터 2023. 10. 28.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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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최종 대학 학력에 집착한다. 명문대를 나오면, 어쨌든 철저한 검증 대신 브랜드 네임이 가진 선입견에 휩쓸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좋은 대학을 나온 이들이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학력 선입견'으로 원래 가진 실력보다 상대방을 더 높게 평가하려는 '이상한 속성'이 배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느 강연에서 던진 홍준표 대구시장의 이 말은 꽤 정확하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학 4년 공부로 평생 먹고 사는 경우가 많다"며 대학 입학에만 매몰된 현상을 지적하기도 했다. 일단 좋은 대학에 입학만 하면 자기 성장과 관계없이 대학 '브랜드' 하나로 연명하는 경우를 그들이 좋은 실력을 가져서 성공하는 케이스만큼 많이 봤다.

신문기자 생활 25년 가까이 하면서 지켜본 눈에 띄는 사람들의 특징은(과장하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 부류는 최고 대학을 나왔지만 그 이후 목표가 또렷하지 않은 사람, 다른 부류는 명문대 출신은 아니지만 평생 어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다. 전자는 그 자리에 있을 때 빛나지만, 한 걸음 앞으로 동행하기가 겁나고 불안하다. 후자는 처음엔 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시간이 갈수록 호기심이 늘면서 같이 일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두 부류의 가장 확실한 차이는 지금 이 순간 계속 '공부하고 있느냐'다.

세상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 상황보다 이만큼 변했는데, 명문대를 나오고도 아직 수십 년 전 문법과 규칙, 이해와 공감의 언어로 소통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입시에 비록 실패해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대학을 나와도 끝없이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가며 넥스트 10년을 보고 현재 흐름을 깊이 통찰하는 이들도 있다.

내가 가장 놀랍고 흥미로웠던 동료들은 나온 대학보다 나갈 미래에 더 천착한 모험가들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분기마다 수십 권을 책을 놓지 않고 꾸준히 서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유연하게 다듬었고 작고 사사로운 일도 하나의 큰 흐름의 단초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집중하며 탐구했다.

/사진=유튜브 캡처


그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주자로 스티브 잡스를 빼놓으면 섭섭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하버드나 스탠포드 같은 최고의 명문대를 나오진 않았지만, 스탠포드만큼이나 등록금이 비싼 교양과목에 역점을 둔, 나름의 권위를 자랑하는 리드 대학교(college)에 다녔다.
그는 재미없는 전공 과목을 6개월 듣고 바로 자퇴하는 대신, 재미있는 과목을 18개월 청강하는 식으로 이 학교에 남아있었다. 브랜드보다 콘텐츠를 앞세운 순간이었다.

그에게 재미를 준 과목은 캘리그라피(서체)로, 훗날 애플의 맥킨토시 컴퓨터에 쓰인 아름다운 활자를 가능케한 1등 공신의 매개(the dot)로 작용한다.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캘리그라피를 공부할 땐 몰랐지만, 10년 뒤에 이런 작은 과거의 점들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연결 고리로 작용했다"며 "그래서 현재가 미래로 연결된다는 사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걸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간 수없이 걷고 뛰고 다양한 근력 운동을 통해 건강에 전념하며 달달 외운 잡스 연설문의 핵심은 마지막 3장에 있었다. 잡스가 어릴 때 즐겨 읽던 지구백과 최종판 뒤쪽 표지판에 적힌 글귀 때문이다. "Stay Hungry. Stay Foolish."(항상 갈망하라. 항상 우직하라.) 잡스는 늘 자신에게 염원하던 그 글귀를 다가올 세대에게 축사로 건넸다.

코로나 발생 초기인 2020년 초, 때마침 악화하던 건강을 잡기 위해 시작한 식단과 건강 관리는 제법 2년이나 굳세게 이어졌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3km씩 뛰던 달리기는 어느새 6km에 이어 10km까지 뛰는, '놀라운 나'와 새로 마주할 수 있었다. 달고 촉촉한 빵은 호밀빵으로, 과일주스는 채소로 대체된 아침을 챙겨 먹는 일도 이젠 필수코스로 자리잡았다. 그런 습관이 만들어 낸 건강검진 결과는 놀라웠다. LDL(저밀도 콜레스테롤)과 중성지방은 반으로 수치가 뚝 떨어졌고 심장은 더욱 튼튼해졌으며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미세한 습관까지 시나브로 고쳐졌다.

하지만 갑자기 맞닥뜨린 안면 골절과 코로나, 장염까지 이어지면서 그간의 습관이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단 게 끌릴 땐 '한 번쯤 괜찮겠지' 하면서 자기 최면을 걸었고 날씨가 조금만 흐리면 오늘은 다칠 수 있으니 하며 건너뛰기 십상이었다.


그러다 가을이 찾아왔고 전국 곳곳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렸다.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인 듯 보였던 대회들이었는데,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 5km, 10km, 하프(21.0975km), 풀(42.195) 코스를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코스가 2개 정도 있다는 사실에 안도와 작은 용기가 생겼다.

한강변에서 매일 혼자 뛰던 패턴과 달리, 수천 명이 함께 뛰는 달리기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고 내가 이런 코스에서도 완주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싶어졌다. 장염까지 털어낸 몸으로 도전하기로 결심한 뒤 결국 대회에 출전했고 10km를 완주하고 나서 자신감이 더욱 붙었다. 우선 기록(1시간 48초)이 그 어느 때보다 잘 나왔다. 평소에 뛸 땐 km당 6분30초대에 머물렀는데, 대회에서 평균 6분4초로 뛰었다. 흔히 '대회빨'이라고 하나, 그것조차 신비롭고 뭉클했다.

이런 자신감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한강변을 찾았다. 무엇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호기가 발동했다. "오늘은 12km에 도전해보리라." 그렇게 10km를 가볍게(?) 넘기고 12km까지 다다르자, 도저히 못 뛸 때까지 한번 뛰고 싶은 욕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21.195km까지 뛰고 바로 넉다운됐다.

코스 완주할 때까지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은 데다, 심지어 뛰기 전 항히스타민제까지 복용하고 시작한 달리기라는 점에서 '최악'이라는 꼬리표가 달릴 법하지만, 집에 가자마자 뻗은 내 모습은 뿌듯함으로 가득찼다. 다리는 뻐근하고 숨은 제대로 못 쉬겠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만큼 졸린 데도, "내가 진짜 완주했다고?" "절대 불가능이라고 여겼던 영역에 도전했다고?" 같은 '반전 결과'에 피곤한 행복을 만끽했다.

이날 이후 너무 힘들어서 "20km 같은 고난의 달리기는 남은 인생에서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는데, 일주일 정도 지나자 다시 몸이 꿈틀댔다. 우선 10km를 달릴 때, 힘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되레 밋밋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11km씩 뛰었고 기록도 조금씩 단축됐다. 2023년 10월 넷째 주 11.24km 달리기 기록은 km당 5분46초였다. 앞으로 며칠 내로 뛰게 될 20km는 더 이상 숙제가 아닌 욕망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과장되게 말하면,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 3년을 돌이켜보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발전하고 나아졌을까.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일처럼 했을까. '루틴은 지겨운 것'이라는 단순한 명제가 사실은 가장 새롭고 현명하고 혁신적인 습관이라는 점을 제대로 깨달았을까.

지나고 나니, 아니 실행해 보니 잡스가 강조한 '헝그리'(hungry)와 '풀리시'(foolish)의 의미가 비로소 읽혔다. 물론 직역으로 이해하면, 공복(hungry)은 최고의 건강 비결 중 하나다. 또 매일 같이 빼놓지 않는 반복의 운동(foolish)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단순한 반복은 'foolish(어리석은) 소모'가 아니라 성과와 도약을 약속하는 'foolish(우직한) 습관'이었다. 이런 반복이 어느 날 포기할 만큼 지겹거나 무료하거나 해야 할 이유를 모를 때 우리는 '열망이 부족해져서'를 가장 큰 이유로 찾을지 모른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이 16강 진출을 확정한 뒤 내뱉은 첫 일성은 "I'm still hungry"(나는 여전히 허기지다)였다. 작은 목표를 이룬 뒤 어떤 열망에 사로잡힐 때 쓸 수밖에 없는 표현으로, 어제의 자신보다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남겨두는 최후의 동기이기도 하다.

hungry와 foolish는 선뜻 결이 달라 보인다. 전자는 본능적이고 후자는 이성적으로 비치기 쉽고 전자가 정신적 갈망을 주요 재료로 삼는 반면, 후자는 육체적 반복(노력, 부지런함)을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육체 없이 정신없고 갈망 없이 노력하지 않기에 둘은 상호보완적이면서 필수불가결한 대상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은 한국이 16강에 오른 뒤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고 말했다./사진=유튜브 캡처


나는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둘의 가치를 빌어왔지만, 비단 건강뿐이겠는가. 자신이 만든 애플에서 해고된 뒤 초심자 마음으로 넥스트(NeXT)와 픽사(Pixar) 등을 세워 다시 애플로 복귀하는 과정은 '열망' 없이는 설명되지 않고, (연설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지금의 윈도우 서체가 애플을 베꼈다고 말할 만큼 그가 보여준 '우직한 길'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티나 실리그, 조슈아 포어 등이 쓴 '루틴의 힘2'을 참고하면, 결과 중심 마인드셋은 자신의 재능이 타인이 정한 조건에 맞는지 살피고 능력을 인정받는다. 결과에서 경쟁 상대가 성과를 낼 때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반면 성장 중심 마인드셋은 타인과의 비교 대신 자신의 발전에 초점을 맞춘다. 어제, 지난달, 작년의 '나'와 비교해 더 잘 해냈는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실수하더라도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의욕과 끈기를 잃지 않는다.

1년 6개월간 달리기를 하면서 타인의 기록과 비교하며 내 기록을 평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달릴 수 있었고 기대보다 기록을 더 단축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루틴의 힘2'으로 다시 돌아오자. 이 책의 에필로그에는 아주 마음에 드는 문구들이 여럿 있다. '더 나은 당신'은 당신이 아는 것들을 똑같이 알고 있는데, 차이가 있다면 '더 나은 당신'이 행동이 좀 더 빠르고 의지력이 더 강하며 추구하는 가치를 더 자주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다.

'더 나은 당신'은 당신의 믿을 만한 가능성이다. 믿을 만한 가능성은 단지 아주 많이 힘겨울 뿐이다. 이소령의 믿을 만한 가능성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였고 무하마드 알리의 믿을 만한 가능성은 역대 최고의 권투 선수였다. 당신의 믿을 만한 가능성이 무엇인지는 당신만이 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더 나은 당신'은 당신 행동에 따라 얼마든지 새롭게 태어나고 죽는다. '더 나은 당신'은 확고히 정해진 과거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바뀌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당신'과 당신 자신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것은 단순히 어제의 당신을 이겼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최고의 당신을 따라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당신이 아는 것처럼, '더 나은 당신'도 알고 있다. 경주에는 스릴이, 움직임에는 즐거움이, 닿을 수 없는 것들을 향한 꾸준한 발걸음에는 벅찬 성취감이 따른다는 것을.

책은 그러므로 더 나은 자신을 찾아 여정을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식단을 챙기고 운동을 열심히 할 땐 그게 나름의 최선이자 역할이라고만 여겼다. 단순히 건강을 위한 '학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꽤 시간이 지난 뒤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고 달라진 모습을 비교하고 "왜 나는 30대 때보다 더 힘들지 않고 좋아 보이지?" 같은 소회를 늘어놓을 때 그것이 비로소 '더 나은 오늘의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나는 이제 '더 나은 내일의 당신'을 위해 내게 주어진 믿을 만한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어졌다. 잡스의 말대로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worn path'(그것이 설사 험한 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침에 일어나 공복(hungry) 상태로 루틴처럼 뛰면(foolish) 최고의 다이어트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고금평 에디터 dann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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