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먹고살 만하다는 착각
노후는 집이 해결해 줄 것이란 막연한 생각 팽배
공급만 봐서는 전망이 불가능한 부동산
몇년전 TV 예능 방송에서 한 연예인이 나와 남편의 씀씀이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이 연예인의 말은 이랬다.
남편이 후배와 마신 술값을 계산하며 “내가 현재 빚이 5억원인데, 빚이 5억50만원이나 5억원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는 것이다.
상당수 사람들이 빚 부담이 가중되고 있지만, 당장 먹고살 만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 착각은 너무나 달콤해서 현실의 고통 따위는 쉽게 잊게 만든다. 모든 것이 그간 오른 집값 때문이다. 예를 들면 수도권에 살고 있는 일부 40대와 50대는 수년 전 2억원의 빚을 내 6억원에 산 집이 11억원이 됐다(2017년 서울아파트 중위 가격 6억원, 2022년 10.9억원). 이자와 원금을 갚고,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빚은 수년 뒤 1억원이 추가돼 3억원이 됐지만, 집값이 올라 자산은 11억원이 됐다. 빚이 늘어도 소비를 하게 되는 용기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노후는 오르는 집값이 해결해 줄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 이들 세대에는 팽배해져 있다.
20대와 30대는 생존을 위해 독특한 선택을 했다. 집을 사기 위해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 DNA를 보존하고자 하는 생물학적 본능을 포기하고 집을 선택하는 것은 인류사에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오죽하면 ‘나는 차라리 부동산과 연애한다’라는 제목의 재태크 서적이 나왔을까.
집값에 기댄 안일하고 달콤한 사고의 근간은 지난해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감에 하락했던 집값이 혹시나 회복됐을까 싶어 집값 추이를 검색해보고 오르기를 기대한다.
지난해와 올초 추락하던 집값이 소폭 반등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흐름이 바뀌자 집값이 다시 튀어 오를 것으로 보는 전문가도 늘었다. 부동산 시장에서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은 방송과 유튜브에 나와 현재 분양 물량이 적어 2년 뒤부터 공급 부족으로 부동산 대란이 있을 것이란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닌다. 이들의 말에 집이 있는 사람, 집이 없는 사람 모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이들 전문가의 상당수는 2021년 집값이 피크를 찍었을 때도 계속해서 오른다고 말했던 사람들이다. 공급이 부족하면 집값이 오른다는 그들의 논리는 맞는 말일까.
과거 사례를 보면 답이 나온다. 2000년 이후 매년 평균 전국에는 약 30만가구의 아파트가 분양됐다. 2010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전국에서 20만가구 남짓 분양해 평년보다 무려 30%나 감소했다. 당시 일부 지역에서는 깡통주택 사태로 평범한 직장인이 노숙자가 된 사례가 나타날 정도로 부동산 시장에 찬바람이 불었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으로 보면 2010년 분양한 아파트가 준공되는 시점인 2012년 말이나 2013년부터는 공급이 부족해 집값이 폭등했어야 했다. 그러나 집값은 2014년말까지 지지부진한 흐름을 보였다.
이듬해인 2015년부터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자, 전국에서 무려 52만가구가, 2016년에는 47만가구가 분양됐다. 공급이 늘어난 만큼 2018년부터는 집값은 하락해야 하는데, 결과는 이 시점부터 집값 급등세가 시작됐다. 사실 올해 아파트 공급도 평년에 비하면 그다지 적은것도 아니다. 올해 예상 분양물량은 약 30만가구로 평년 수준이다.
먹고살 만하다는 착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값이 우상향돼야 한다. 하지만 상황은 기대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와 경제상황에 따라 깨질 가능성이 커졌다. 집값의 발목을 잡는 고금리는 한국은행 총재가 경고한데로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거래량이 줄며 집값 반등세가 꺾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올해 젊은층들의 내 집 마련에 불을 붙였던 ‘특례보금자리론’ 같은 상품도 가계부채가 위험 수위에 도달한 현 시점에서 다시 나오기는 어렵다.
부동산 시장은 한번 신뢰가 깨지면, 다시 회복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지금이 부동산 투자 적기라며 영끌(영혼까지 끌어다 투자)해 들어가는 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다만 공급이라는 한쪽 측면만 보고 베팅을 한다면, 부동산과 연애 기간은 달콤함을 맛보기도 전에, 생각보다도 짧게 끝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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