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에 밀려난 2인자 리커창, 심장마비로 급사
중국 경제를 시장 주도로 바꾸려 힘쓴 개혁가였지만 오랜 라이벌인 시진핑에 의해 그림자 속으로 밀려났던 리커창(68) 전 중국 총리가 27일 0시 10분 상하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지난 3월 총리직에서 물러난 지 7개월여 만이다. 중국 CCTV·신화통신에 따르면, 리커창은 26일 심장마비가 와 병원으로 이송됐다. 상하이의 소식통은 “리커창이 수영 중에 심장마비가 왔다고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날 저녁에 공개된 리커창의 공식 부고는 “리커창은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잘 관리했다”고 평가했다. 그가 총리에 오른 직후인 2014년에 ‘벽을 돌파하는 사람(破壁者·중국 정부망)’으로 규정됐던 것과 대조적이다. 창업 대중화, 규제 철폐 등 그의 대표적 성과는 언급되지 않고 시진핑 국가주석의 역점 사업인 일대일로 등이 강조됐다. 리펑(李鵬) 전 총리(2019년 사망)의 부고와 비슷하게 2256자(字)였지만 ‘시진핑 사상’ 등의 언급이 많아 실제 분량은 적었다.
리커창은 시진핑의 평생 라이벌이었다. 하지만 삶의 궤적은 달랐다. 혁명 원로 자제인 태자당(太子黨) 출신인 시진핑과 달리 리커창은 스스로 노력해 엘리트 코스를 밟아 권력의 정점에 섰다. 문화혁명 때 중단됐던 대입 시험이 재개되자 독학으로 1977년 베이징대 법학과에 들어갔고, 이후 중국 최고 지도부에는 흔치 않았던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지도부로 활동한 뒤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시기인 2008년부터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다. 같은 공청단파인 후진타오 전 주석의 지원을 받으며 강력한 주석 후보로 부상했다. 하지만 장쩌민이 주도한 상하이방과 태자당이 밀어준 시진핑이 2013년 주석에 오르면서 리커창은 이인자인 총리가 됐다.
시진핑 집권 초기에는 시진핑·리커창 투톱 체제를 의미하는 ‘시리쭈허(習李組合)’란 표현이 언론에 등장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라이벌이던 리커창에게 실권을 허락하지 않았고, 총리의 고유 영역인 경제 분야에서도 역할을 축소했다.
영미권 언론은 중국의 경제를 국가 주도에서 자유 시장 경쟁 체제로 바꾸려 했던 리커창의 개혁 시도를 재평가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리커창은 시장에 더 큰 역할을 부여하길 원했고 민간 기업이 국영 기업과 공정히 경쟁할 기회를 약속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 방향은 시진핑과 달랐고 결국 성공은 제한됐다”고 전했다.
리커창은 성장을 중시한 반면 시진핑은 분배를 우선해 ‘공동부유(共同富裕·다 함께 잘살기)’를 내걸었다. 리커창은 국영 기업 규모를 줄이고 시장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시진핑은 국영 기업의 덩치를 불리고 당이 기업 경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NYT는 “리커창의 삶은 잠재적 개혁가들이 권한을 박탈당한 시진핑 시대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전했다. 리커창은 2020년 외신 기자회견에선 “중국인 6억명의 월수입이 1000위안(약 19만원)에 불과하다”고 말했는데, 빈곤 해결을 성과로 내세운 시진핑에게 쓴소리를 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2007년 리커창이 랴오닝성 당서기였을 때 한 미국 인사에게 “국내총생산(GDP) 등 지표는 조작이 가능해 믿지 않는다”고 털어놓은 일화도 유명하다. 위키리크스의 비밀 외교 문서 폭로로 발언이 드러난 후 리커창이 주로 참고한다는 ‘철도 물동량, 전력 소비량, 은행 신규 대출’ 3가지 지표가 ‘커창 지수’로 불리며 외부에서 중국 경제를 예측하는 잣대로 자리 잡았다. 글로벌 투자사들 사이에 ‘리커창’과 ‘경제(economics)’를 딴 ‘리코노믹스’란 용어도 널리 쓰였다.
정치적으론 리커창의 사망으로 시진핑 견제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진핑 시대의 ‘원로 4인방(장쩌민·후진타오·주룽지·원자바오)’ 가운데 장쩌민 전 주석은 지난해 11월 30일 사망했다. 후진타오(81) 전 주석은 지난해 10월 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20차 당 대회 폐막식 도중 수행원에게 끌려나가다시피 퇴장한 이후 공식 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주룽지(95) 전 총리는 고령이고, 원자바오(81) 전 총리는 건강 이상설도 제기된다. 이런 가운데 리커창까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시진핑 일인 집중 체제가 공고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베이징의 소식통은 “리커창은 중국 관영 매체들이 최근 그의 과거 경제 정책을 비판해 압박감이 심했을 것”이라며 “당뇨병·고혈압 등 지병이 있는 상황에서 스트레스가 커지자 심장마비가 발병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 3월 2일 퇴임 직전 열린 송별회에서 리커창은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幹, 天在看]”면서 하늘을 가리켰다. 이는 제갈량이 유비가 사망한 이후 북벌을 앞두고 했던 말로, 이어지는 문구는 ‘머리 위에 천지신명이 지켜보고 있다[擧頭三尺有神明]’이다. 중화권 매체들은 리커창이 시진핑을 겨냥해 이 같은 말을 했다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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