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과 행적 담긴 증명서… 紋章 알면 유럽사 보인다

채민기 기자 2023. 10. 28.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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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문장 이야기

모리 마모루 지음|서수지 옮김|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424쪽|2만8000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재위 1327~1377)가 대대로 내려오는 ‘세 마리 사자’ 문장(紋章)에 프랑스의 백합 문양을 추가한 때는 1340년 전후였다. 외삼촌인 프랑스 국왕 샤를 4세 사후에 조카로서 왕위를 요구해온 그가 프랑스를 침공한 시기다. 문장 개정은 자신이 두 나라 모두의 왕임을 천명한 조치였다.

오늘날 영국 국왕의 문장에는 아일랜드의 클로버, 스코틀랜드의 엉겅퀴와 함께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장미가 들어간다. 15세기 요크 가문의 흰 장미, 랭카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를 합친 ‘튜더 로즈’다. 왕위를 놓고 장미 전쟁(1455~1485)을 벌였던 두 가문이 화해하며 출범한 튜더 왕조의 꽃이 잉글랜드의 상징으로 전해진 것이다.

문장은 유럽사를 읽는 창(窓)이다. 그러나 “서양의 것이라면 모방하고 보는” 일본에서도 어설프게 흉내 낸 문장을 이런저런 상표에 남발할 뿐 진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NHK 기자였던 저자는 호기심을 품었다. 문장이란 무엇일까? 답을 찾아 심오한 문장의 세계를 누빈 36년의 결과물이 이 책이다. 서양 문장 읽는 법을 ABC부터 알려주는 입문서이자 문장을 단서로 유럽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는 안내서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문장(왼쪽). 사자와 유니콘이 떠받치는 방패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상징이 들어 있다. 방패 주위에는 '악을 생각하는 자에게 수치를'이라는 문구, 하단에는 '신과 나의 권리'라는 영국 군주의 모토가 있다. 오른쪽은 쌍두독수리가 관을 쓴 제정 러시아의 문장. 가슴의 문양은 모스크바를, 날개에 품은 문양들은 제국의 일부였던 폴란드 왕국, 시베리아 등을 상징한다.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유럽 역사를 읽는 창

11~12세기 유럽에 등장한 문장은 대를 이어 세습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표시와 구별된다. 한 가문에서도 개인별로 다르다는 점에서 일본의 문장과도 차이가 있다. 유럽 밖에서 유일하게 문장이 보편화된 국가인 일본에는 가문(家紋)이 있을 뿐이다. 유럽에선 거기에 작은 기호를 추가하거나 색을 바꾸는 방식으로 ‘차남의 셋째 아들’ 따위를 표현했다.

최초의 문장은 전장에서 피아를 식별하는 수단이었다. 금속 갑주를 두른 기사들이 서로 알아보기 위해 방패에 고유 문양을 그려 넣은 것이 시초다. 투구의 작은 틈으로 내다봐도 한눈에 들어와야 했기에 색이 뚜렷했다. 금·은색과 빨강·파랑·검정 등 몇 가지 기본색만 허용됐다. 중간색이나 파스텔톤은 엄격하게 금지됐다.

도식화된 문장의 중앙에 자리 잡은 방패는 군사적 기원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주위에 그려진 천은 갑주가 햇빛에 달궈지지 않도록 두르던 망토를 형상화한 것이다. 망토가 리본이나 끈처럼 보이는 것은 적의 칼에 갈가리 찢긴 형상을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문장은 점차 다른 분야로 확대됐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여성이나 성직자의 문장이 등장하고 각계의 유명 인사들도 문장을 썼다. 과학자인 뉴턴의 문장에는 뼈,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문장에는 펜이 그려져 있다. 나막신부터 속옷에 이르기까지 상상 가능한 모든 그림이 문장에 들어갔다.

문장은 사용자의 지위, 소속 가문, 활동 연대와 지역·분야 등을 아우르는 증명서와도 같다. 귀족들이 혼인하거나 영지를 병합하는 경우에는 문장도 합쳤다. 따라서 문장을 읽는 일은 인물과 가문의 행적을 읽는 일, 곧 역사를 읽는 일이다. 문장은 역사 자체만큼이나 방대하다. “문장은 유럽 전역에 150만종이 넘는 가짓수를 자랑한다. 나라와 지방에 따라서도 서로 다른 시스템과 규칙이 존재하는 복잡한 세계다.”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전통

저자는 유럽 문장의 변천을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영국 왕가의 문장사(史)는 별도의 장으로 서술했다. “문장 제도의 전통이 살아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나폴레옹 1세가 문장 제도를 개혁해 혼선을 빚었고 독일은 통일국가로 존속한 역사가 짧아 지역적 차이가 너무 크다. 반면 잉글랜드에는 등록·소송을 비롯한 문장 관련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문장원·College of Arms)이 15세기에 창설돼 지금도 존재한다. 문장원 총재직 역시 노포크 공작 가문의 세습 직위로 이어지고 있다.

영국의 문장원 총재는 의회의 개회와 국왕의 장례식·대관식을 주관한다. 지난해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하고 찰스 3세가 즉위할 때 국가 예식을 주관한 인물이 현 문장원 총재이자 18대 노포크 공작인 에드워드 피츠앨런-하워드였다. 새 국왕의 즉위를 알리는 포고문을 낭독한 문장원 관리를 대동하고 세인트 제임스 궁전의 발코니에 서서 군중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디언은 “주어진 책무의 하나로서 공작은 즉위 선언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소개했다. 문장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세상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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