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208] 뉴욕의 델리
가공육이나 치즈 등을 판매하는 상점 델리(Deli)는 ‘맛있는 음식’을 뜻하는 독일어 ‘델리카테슨(Delicatessen)’을 어원으로 한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이민자들에 의해서 뉴욕에도 여러 개의 델리가 생겨났다. 단지 식재료를 판매하는 곳이 아닌, 샌드위치 등으로 간단한 식사도 해결할 수 있는, 상점에서 식당으로 그 개념이 바뀌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캐츠(Katz)’.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영화에서 맥 라이언의 오르가즘 장면으로 유명한 장소다. 특히 롭 라이너 감독의 어머니가 연기했던 옆 테이블 할머니의 “저 여자가 먹는 거 나도 달라(I’ll Have What She’s Having)”는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4개월간 ‘뉴욕 역사 협회(New York Historical Society)’에서 열렸던 전시 ‘유태인 델리(The Jewish Deli)’의 제목이기도 했다.
맨해튼의 중심가 한 블록에 보통 수천 명에서 만 명 정도가 근무한다. 이 사람들이 짧은 점심시간 동안 고층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기다려 타고 건물 밖으로 나와서, 몇 블록 떨어진 식당에 차분히 앉아 점심을 먹고 돌아오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그래서 많은 뉴요커들은 블록마다 한두 개씩 있는 델리에서 줄 서서 음식을 픽업해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델리의 핵심은 스피드다. 빠른 시간 내에 수백 명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계산을 마치고 떠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빨리 걷고, 빨리 말하고, 빨리 먹는 뉴욕에서 ‘천천히(slow)’라는 단어는 욕이다. 뉴요커의 이런 속도를 맞추어 서비스를 제공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빨리빨리”가 일상인 한국인들이다. 1980년대부터 델리가 급증, 현재 맨해튼 3천여 개의 델리 중 5백여 개를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다. 샌드위치뿐 아니라 샐러드, 커피, 베이글, 비빔밥, 라면 등 다양한 메뉴를 취급한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형태를 바꾸어가며 존재하는 뉴욕의 델리는 이민자들의 삶과 늘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델리의 분주한 점심시간은 맨해튼의 고층 건물이나 혼잡한 거리만큼이나 뉴욕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뉴욕스러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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