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멸치 국수 한 그릇

최여정 작가 2023. 10. 28.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엄마가 끓여준 그 비릿한 국물
그토록 싫었는데 왜 그리운가
일러스트=김영석

자고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살아보니 정말 그렇다.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참아내고 끊임없는 훈육 끝에, 혹은 죽은 사람도 살려낼 만한 사랑의 힘으로 사람이 바뀌는 듯도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일탈일 뿐이다. 사람의 본성은 놀라운 탄성력으로 ‘나는 원래 이래!’를 외치며 제자리로 돌아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입맛은 고쳐진다. 아니, 이건 뭐 민망스러울 정도로 변덕이 죽 끓듯 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보통 인내심도 더 생기기 마련이고 체면도 더 차리기 마련이건만, 입맛만은 아니다. 어렸을 땐 엄마가 쫓아다니며 떠먹이려던 음식도 꽤나 오랫동안 보이콧하며 나만의 음식 취향이라는 걸 지켜냈건만, 이제는 숫제 식욕만 더 늘어서 하루에도 열두번씩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더니, 기어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내가 엄마에게 반항하며 끝까지 보이콧했던 음식이 바로 ‘멸치 국수’다. 왜 싫어했나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답은 그냥 엄마가 좋아하니까, 맨날 멸치 국수 먹자고 하니까. 참으로 고약한 심보다. 엄마는 멸치 국수를 좋아하신다. 아버지를 회사로, 또 나와 내 동생을 학교로 보내는 전쟁을 치르고 난 뒤에 혼자 남겨진 엄마는 매일 멸치 국수를 드시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늦은 오후, 온 집 안에는 은은하게 멸치 우린 내가 감돌았다. 식구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에서 인사를 건네는 엄마 앞을 쌩하고 지나치며 ‘어유, 멸치 비린내!’ 쏘아붙이고는 내 방으로 직진하기 일쑤였다.

주말 오후에는 어김없이 식구들을 향해 ‘오늘은 멸치 국수 해먹을까?’라고 엄마는 명랑하게 외쳤다. 마치 꽤 오랜만에 별미를 해먹자는 듯이 말하는 엄마에게, ‘지난주에도 먹었단 말야!’라며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그 지난주에 온 식구가 멸치 국수를 맛있게 먹는 와중에도 혼자 끝끝내 밥을 고집해서 엄마를 괴롭혀 놓고도 말이다. 그랬던 내가, 마흔이 넘어갈 무렵에야, 멸치 국수의 맛을 알아버렸다. 비가 오거나, 날이 좀 추워지거나, 갑자기 감기 기운이 도는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해지면 다른 것도 아니고 엄마가 끓여주시던 그 구수하면서도 비릿한 멸치 국수 국물이 그렇게 먹고 싶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맹물에 멸치 한 줌과 값싸고 흔하디 흔한 소면을 넣고 끓이면 완성되는 줄 알았던 멸치 국수는, 맛있게 하려면 제법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다. 불 앞에 지키고 서서 국수가 끓어오를 때마다 찬물을 서너 번 부어 식혀가는 엄마의 수고로움 덕분에 면이 풀어지지 않았고, 멸치 머리며 내장을 꼼꼼히 떼어내 쓴맛을 없애고 프라이팬에 한번 덖어 비린내를 날리고 나서야 멸치 육수를 내는 엄마의 정성 덕분에 국물이 그리 구수했던 것이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보기 전에 종종 들르는 멸치 국수 집이 있다. 1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멸치 국수 한 그릇 값은 4500원. 지하에 위치한 3평 남짓한 작은 가게는 언제나 손님들로 빼곡하다. 주로 인근 성균관대 학생들이나 서둘러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를 달래고 공연장으로 향할 관객들이다. 인상 좋은 주인 아주머니와 옌볜 사투리를 쓰시는 조선족 아주머니 둘이 손님을 맞이했는데, 오랜만에 들르니 무뚝뚝한 인상의 아저씨로 주인이 바뀌었다.

4500원짜리 기본 멸치 국수 하나에다가 3000원 하는 미니 명란마요비빔밥을 추가하니 한 끼가 넉넉해진다. 주문을 하고 키오스크 바로 옆자리에 혼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검은 얼굴에 굵은 주름이 패고 커다란 륙색을 어깨에 짊어진 예순 남짓 남자가 혼자 들어선다. 키오스크 앞에 서는데, 어째 기척이 없다. 처음엔 키오스크 주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데, 바로 내 뒤에서 꼼짝도 안 하고 서 있을 그분에게 온 신경이 집중된다. 아, 키오스크 문제가 아니구나, 돈이 없으시구나.

국수 한 그릇 주문해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일어나려는데 남자가 성큼성큼 주방으로 다가가더니, 가스레인지 쪽으로 등을 돌리고 국수를 삶고 있는 주인 아저씨에게 말을 건다. 작은 가게 안으로 그 말이 또렷하게 울린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배가 너무 고픈데 돈이 없습니다. 국수 한 그릇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국수 그릇에 얼굴을 묻고 젓가락질을 하던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이 일제히 남자를 바라보다가는, 다시 일제히 주인 아저씨에게로 시선이 향한다. 주인 아저씨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돌려 남자와 마주 선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침묵.

“네, 국수 드릴게요. 여기 빈자리에 앉으세요. 돈을 빌려달라고 하셨으면 없다고 했을 텐데, 국수는 얼마든지 드실 수 있습니다.” 남자는 그제야 무거운 가방을 발밑에 내려놓더니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국수를 기다린다. 그리고 곧 주인 아저씨가 건네는 뜨거운 멸치 국수 한 그릇. 남자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젓가락을 든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릇을 받치고 맛있게, 정말 맛있게 멸치 국물을 마신다. 나도 남은 멸치 국물을 후루룩 소리 내며 비웠다. 온몸이 이내 따뜻해지는데, 문득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 멸치 국수 한 그릇 끓여줘!”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