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예술가를 후원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개’ 로버트로부터
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340쪽 | 1만6800원
미국의 한 만찬장. 화가 ‘안이지’와 그를 후원하겠다는 ‘로버트’가 5m 길이 식탁 양끝에 앉아 있다. 한국에서 미술 학원을 운영하던 이지는 코로나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엄청난 지원을 해주겠다는 로버트재단의 연락을 받고 이곳에 왔다. 만찬장엔 로버트의 콧소리만이 들린다. 둘은 대화를 몇 마디 나누지만, 왜인지 소통이 안 된다. 그럴 수밖에. 로버트는 ‘개’다. 그의 생각이 기계와 번역가 등을 통해 말로 전달된 것.
소설은 개가 예술가를 후원한다는 설정을 통해 예술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 개가 인간과 소통하고, 예술가로 추앙받는 대목이 실소를 유발한다. 로버트는 그랜드캐니언에서 한 커플의 프로포즈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커플은 그 직후 목숨을 잃었고, 사진 속 여성의 아버지인 사업가가 딸의 마지막을 기록한 보답으로 로버트를 위한 미술재단을 만들어줬다.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 이어진다. 개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언어는 ‘로버트 리터러시’ 내지는 ‘마법’이라는 표현으로 합리화된다. 재단은 후원 조건으로 전시가 끝나면 그림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는 것을 내거는데, 이것 역시 로버트가 고른다. 소각식이란 퍼포먼스가 작품과 작가의 상업적 가치를 올린다는 이유 때문. 이지는 이런 상황에 의문을 갖고 타개책을 모색하지만, 이 고민에 계속 시달린다. 무엇이 진정한 예술인가. 상업적 가치와 예술을 맞바꿀 수 있는가.
동아시아 작가로는 처음 영국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받은 윤고은의 신작 장편. 한참 웃으며 책장을 덮은 뒤엔, 웃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현실엔 이미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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