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튀는 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경기장에서 마시는 맥주
한낮의 경기장에서 맥주를 마시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선데이 브레드 클럽 멤버 P님 덕분이다. 내게는 매우 느슨한 모임이 몇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일요일에 모여 빵을 먹는 모임이다. ‘자, 우리 오늘부터 일요일에 만나 빵을 먹읍시다!’ 이렇게 조직된 건 당연히 아니고, ‘언젠가 빵 투어를 하고 싶다’라고 혼자만의 바람을 말했더니 마침 옆에 계시던 두 분이 ‘저도요’라고 해서 그렇게 되었다. 이 모임의 이름이 ‘선데이 브레드 클럽’이다.
선데이 브레드 클럽의 조직원은 나까지 총 세 명으로, 이름 그대로 일요일에 모여 빵을 먹는 모임이다. 빵을 먹기 위해 일요일에 모인다는 게 더 맞을 수도 있겠다. 11시나 12쯤 빵집에서 만나 빵과 커피를 마시기. 이게 우리 빵 모임의 유일한 목적이다. 아직까지 두 번 모임을 했는데 어쩌다 보니 둘 다 일요일이어서 조직원 중 한 분께서 ‘선데이 브레드 클럽’이라고 명명해 주셨다.
딱히 셋이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나이도 차이가 있고, 하는 일도 다르다. 전화를 걸기보다는 DM을 보내는 게 편하고, 셋이 대화할 때는 아이메시지 방을 쓴다. 둘은 사교적이고 쾌활하지만 한 사람은 그렇지 않고, 둘은 운동을 하지만 한 사람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셋이 만나서 빵을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즐겁다. 빵을 먹고 나서는 뭔가 소소한 활동을 도모하는데, 첫 번째 만남에서는 미술관에 갔고 두 번째에는 테니스 경기를 보러 갔다.
두 번째 선데이 브레드 클럽을 앞두고 P님이 아이메시지 방에 제안하셨다. 11시에 간단히 빵을 먹고 코리아오픈 결승을 보러 가는 게 어떠냐고. “날씨 좋은 날 공 팡팡 튀는 소리 듣는 거 너무 좋지 않을까요?”라면서. 나는 무척 좋아한다. 이렇게 내가 잘 모르고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 인도해 주시는 분을. 공 팡팡 튀는 소리도 물론 좋아하고.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매번 같은 경로로 산책을 했는데, 그 경로로 가야 공 팡팡 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테니스 규칙도 모르고, 라켓도 잡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귀에도 그 소리가 좋았다.
그렇게 난생처음으로 테니스 결승전에 가게 되었다. 복식은 12시 반부터, 단식은 오후 3시부턴데 적당할 때 들어가서 보고 싶은 만큼 보고 나오자고 P님이 말했다. 우리는 복식 경기 중에 들어갔다. 일단 나는 테니스 경기장이 그렇게 컬러풀한 공간인 줄 몰랐다. 테니스코트는 파란색, 코트의 바깥면은 초록색, 그리고 가을 하늘. 구름도 적당히 있는 가을 하늘까지 더해져 컬러 테라피를 받는 느낌이었달까. 복식에서 뛰는 네 명의 선수가 뿜어내는 열기와 현란한 풋워크로부터 전해지는 에너지까지 더해져 마음의 어딘가가 차올랐다. 햇볕도 좋고, 구름도 좋고, 기온도 좋고, 바람도 좋던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볼보이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공이 코트 위로 흐르면 후루루 달려나와 재빨리 공을 수거해가는 볼보이와 볼걸들의 절도 있는 몸놀림을 보면서 여러 번 경탄했다. 열중쉬어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대기하다가 어쩜 저렇게 스텝이 엉키는 일 없이 효율적으로 볼을 수거할 수 있는지 말이다. 프로 세계의 테니스 경기를 처음으로 봤으니 프로 세계의 볼보이도 처음으로 본 것인데, 역시 프로 세계의 일답게 아무나 볼보이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복식이 끝나고 단식이 시작되기 전의 코트 바깥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운동으로 다져진 데다 좋아하는 테니스를 보고 흥분해 있던 관중들로부터 전해지던 그 생명력이란… 자연광이 아닌 형광등 불빛으로 태닝하시는 허약한 분들만 봐와서 그런지 관중들이 집단적으로 발산하는 건강미는 낯설고도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며 미루고 미루던 운동을 정말 시작해야겠다는 각오를 품고 걷는데 맥주 부스가 보였다.
에일과 라거, 두 가지 맥주가 있었다. 판매원이 직접 따라주는 생맥주였다. 청포도와 유자, 제피의 풍미가 조화로운 스파클링 에일이라는 테이스팅 노트를 보고 에일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샴페인 효모를 사용해 부드럽고 섬세한 탄산감과 프루티함과 시트러스함을 지닌 게 특징이라는 말도 있었다. 맛있는 에일이었다. 뚜껑이 있는 플라스틱 잔에 든 맥주를 들고 선데이 브레드 클럽 멤버 셋은 맥주 부스 앞에서 건배했다. 한 모금 마시고는 바로 뚜껑을 덮어야 했다. 곧 단식 결승전이 시작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테니스코트를 보면서 맥주를 마셨다. 테니스코트에는 결승전을 치르는 두 선수가 있었고, 테니스코트와 선수를 배경으로 미세먼지 없는 가을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가끔 바람이 불었다. 햇볕 아래서 이렇게 맛있게 맥주를 마신 적이 있었나 싶었다. 이렇게 이런 종류의 기쁨이 있는지 모르던 사람의 인생 속으로 ‘경기장의 맥주’라는 장르가 들어왔다.
테니스코트는 아니었지만 경기장에서, 지붕이 없는 경기장에서 맥주를 마신 적은 있다. 야구장에서였다. 잠실이라는 건 기억하지만, 엘지트윈스와 어디가 경기를 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그때도 누군가의 제안을 따라 야구장에 갔고 맥주를 마셨다. 분명히 기억나는 하나는 지독히도 맛이 없는 맥주였다는 것이다. 거품이 하나도 없는 데다 시원하기는커녕 상온에 가까운 온도의 맥주였다. 테니스코트를 보며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장의 형편없던 맥주가 떠올랐다. 요즘 야구장에서 마시는 맥주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여전히 하이트나 카스만 팔지, 아니면 IPA나 에일 같은 맥주도 팔지 말이다.
윔블던 경기 영상을 보다가 관중들 손에 들린 칵테일이 뭔지 궁금해했던 일이 떠올랐다. 옅은 빨간색 음료 안에 과일 조각이 들어 있었다. 핌스(Pimm’s)였다. 진을 베이스로 한 리큐르 중에 핌스라는 게 있는데, 그걸 잔에 붓고 과일과 야채를 넣는 칵테일도 핌스라고 하는 것 같다. 영국식 상그리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윔블던의 상징이 되어서 경기장에서 모두들 이걸 들고 있다고 한다. 생크림과 딸기, 그리고 핌스를 먹으면서 윔블던 경기를 보는 게 윔블던을 즐기는 재미 중의 하나라는 말을 들으니 핌스를 만들어 주는 바를 찾아내고 싶어졌다. 선데이 브레드 클럽 멤버들과 빵을 먹고 가려면 일찍 여는 곳이라야 하는데. 핌스를 마시며 윔블던 이야기를 하기만 해도 팡팡 공 튀기는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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