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은 사치마저 없다면 이 가을 무엇으로 쓸쓸하랴

양세욱 인제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23. 10. 2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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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양세욱의 호모 코쿠엔스] 해태식당 ‘연포정식’
매일 전남 고흥에서 받는 신선한 낙지로 끓여낸 연포탕과 16가지 반찬이 어우러진 해태식당의 연포정식. /양세욱 제공

낙지는 가을의 선물이다. 브람스 실내악이나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의 쓸쓸한 선율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면 낙지는 살이 적당히 오르고 알맞게 차지면서 제철을 맞는다. 쓰러진 소도 일으켜 세운다는 전설은 몰라도, ‘펄 속의 산삼’이라는 별명이나 ‘봄 조개, 가을 낙지’라는 속담은 허언이 아니다.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발길이 향하는 식당이 있다. 서울대입구역과 봉천역 사이에 있는 낙지 요리 전문점 ‘해태식당’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 내리면 가슴 한편에 휑한 바람이 인다. 열일곱 가난한 신입생 시절부터 서른일곱에 스산한 강사 생활을 청산할 때까지 꼬박 스무 해 동안 먹고 자고 살아낸 흔적이 도처에서 아우성을 지른다. 낙성대까지 이어지는 샤로수길(’ㅅㄱㄷ’을 조합한 서울대 정문 모양에서 온 이름)은 명소로 대변신에 성공했지만, 맞은편 봉천역 방향 뒷골목은 다정하고 조금은 낡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요란하게 골목을 누비는 배달 오토바이만이 낯설다.

어항에 가득한 낙지들이 먼저 손님을 맞는다. 1990년에 개업해 33년째 영업을 이어온 해태식당 차림표에는 연포정식부터 산낙지정식, 낙지무침, 낙지전골, 낙지볶음, 낙지비빔밥, 낙지탕탕, 갈낙탕, 낙지호롱구이, 산낙지, 낙지죽, 낙지육회까지 단번에 침샘을 자극하는 낙지 요리가 빼곡하지만, 변함없는 대표 메뉴는 연포정식(2만5000원)이다. 매일 전남 고흥에서 받는 신선한 낙지로 끓여 낸 연포탕에 어리굴젓을 비롯해 안주인이 손수 준비하는 16가지 남도식 반찬이 어우러진 푸짐한 한 상 차림이다.

해태식당의 연포탕은 특별하다. 연포탕은 보통 채소와 갖은 양념을 먼저 끓인 후 마지막에 산낙지를 넣는다. 오래 끓이면 낙지 살이 굳기 때문이다. 연포탕(軟泡湯)도 부드러운 두부처럼 끓인 탕이라는 뜻이다. 해태식당에서는 처음부터 찬물에 낙지를 넣고 끓이기 시작하고, 5~6분 뒤에야 당근, 양파, 대파, 잣, 마늘, 홍고추, 청양고추를 넣는다. 평범한 비법 양념도 한 가지 더한다. 이렇게 끓여 낸 연포탕은 알맞게 차지고 한없이 시원하다.

영화 ‘올드보이’ 속 명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주인공 오대수가 일식집에서 낙지 한 마리를 통째로 씹어가며 복수를 다짐하는 대목이다. 머리가 잘려 나간 낙지의 다리 하나가 코를 감싸면서 기괴함은 극에 달했다. 사실 낙지도 낙지 요리도 나라 밖에서는 낯설다.

문어나 오징어는 세계 바다에 고루 분포하지만, 낙지 서식지는 동아시아 연안이고 그 가운데서도 영암과 목포에서 지금 ‘갯벌낙지축제’가 한창인 무안까지 이어지는 전남 해안이 최대 서식지다. 해태식당 사장도 영암이 고향이다. 자연스럽게 낙지의 최대 소비지 또한 남한이다. 두족류 연체동물을 우리처럼 낙지, 문어, 오징어, 갑오징어 등으로 섬세하게 나누어 부르는 언어권도 드물다. 북한에서조차 뼈가 있는 갑오징어만 오징어로 부르고, 나머지는 대충 낙지로 부른다.

부담스러운 가격 때문에 드문드문 해태식당을 찾기 시작한 때가 복학할 무렵이니 어느덧 30년 단골이 되어간다. 단골은 단골이되 게으른 단골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장님 내외는 변함없이 살갑게 맞아주지만, 순간의 비애를 감추기는 어렵다. 처음 만날 때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내외는 이제 70대 중반이다. 코로나 이후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매출 얘기부터, 돌아가기 직전까지 이곳 연포탕을 찾던 서울대 총장, 수저와 물통을 따로 챙겨 다니던 대기업 회장, 나만큼이나 오랜 단골이지만 TV조선 출연 때문에 바빠서 그런지 요즘 발길이 뜸하다는 만화가까지 밀린 얘기는 오후 반나절로도 부족하다.

어느 때나 불쑥 찾아가도 정겹고 맛있는 식당,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며 함께 늙어갈 식당이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 깊어가는 이 가을, 연포탕의 작은 사치마저 없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쓸쓸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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