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도 몰랐다, ‘전세지옥’행 계약서인 줄은[책의 향기]
비전문가가 위험 매물 중개 알선… 부동산 중개 제도-시장 허점 담아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도움 되길”
◇전세지옥/최지수 지음/260쪽·1만8000원·세종
전세사기 빚 갚으러 다시 한국으로 한국에서 전세사기를 당한 저자가 2021년 말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한 기업에 취업한 이후 1년 4개월간 부다페스트에 머물 당시의 모습. 저자는 이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매달 300만 원에 달하는 카드론을 갚기 위해 퇴사를 결심하고 한국행을 택했다. 세종 제공 |
2021년 7월 5일, 여느 때처럼 취업 면접을 본 뒤 밤늦게 귀가한 취업준비생 앞으로 법원의 안내문 한 통이 날아왔다. 안내문은 그의 집뿐 아니라 빌라 층마다 모든 집의 현관문에 붙어 있었다. 책상 서랍 깊이 넣어둔 전세계약서를 꺼내 문서에 기재된 건물주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상대는 알고 보니 건물주가 아닌 건물 관리소장이었다. 관리소장으로부터 진짜 건물주 전화번호를 받았지만 수십 통을 걸어도 묵묵부답이었다. 그날 이후 청년은 ‘전세사기 피해자’가 됐다.
생애 첫 대출을 받아 5800만 원짜리 전셋집을 마련했던 한 평범한 청년(32)이 전세사기 피해자가 된 뒤 2년 3개월간 기록한 일기를 토대로 쓴 에세이다. 바퀴벌레가 나오는 기숙사에서 벗어나 ‘집 같은 집’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한 청년의 일기 속엔 한국 부동산중개업 제도와 부동산 시장의 허점이 낱낱이 담겨 있다.
책엔 ‘알고 보니’란 말이 자주 나온다. 알고 보니 저자에게 집을 소개해 준 공인중개사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없는 단순 영업인이었다. 알고 보니 공인중개사법은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없어도 부동산에서 일하고 매물을 소개할 수 있게 했다. 2금융권에서 받은 근저당 대출 33억 원을 안고 있던 빌라를 취업준비생인 저자에게 권했던 그 사람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냐”며 계약을 부추겼다. 공인중개업소 사장은 자신이 건물주의 대리인이라며 집주인과의 만남도 주선하지 않고 계약서를 내밀었다.
알고 보니 공인중개업소 사장이 “사고가 터져도 1억 원 내에서 공제받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공제증서는 공인중개사 과실이 인정될 때만 효력이 있었다. 집이 경매로 넘어간 건 공인중개사의 과실이 아니었다. 건물주가 소유한 다세대주택이 경매로 넘어갈 경우, 낙찰금으로 은행 근저당을 먼저 갚고 입주일이 빠른 순서대로 배당 우선순위를 갖는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입주일이 다른 입주자들보다 늦었던 저자는 전세자금 중 단 한 푼도 끝내 되돌려 받지 못했다. 저자에게 남은 건 전세자금대출로 받은 빚 4640만 원이었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저자가 2020년 7월 전세대출을 받아 계약한 충남 천안시 서북구의 한 빌라 내부 모습이다. 계약 1년 뒤 저자는 해당 건물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법원 공문을 받았다. ‘전세사기 피해자’가 된 그는 전세금 5800만 원을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
조종사가 되고픈 저자는 꿈을 이룰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올해 12월 15일부터 원양상선에 오를 거라고 한다.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조종사 훈련비를 지원해주겠다는 부모의 제안을 거절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최소한 나에겐 젊음과 건강이 있다. … 전세사기를 당한 지금도 꿈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사기 피해로 전세자금은 모두 잃었지만, 꿈은 잃지 않기 위해 분투했던 한 청년의 일기에서 생의 의지가 느껴진다. “잠시라도 잊고 싶어 애써 묻어뒀던 기억”을 저자가 애써 기록한 이유는 자신의 글을 읽고 자신과 같은 현실에 놓인 이들이 살아갈 힘을 얻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책 서두에 저자는 이렇게 썼다. “절대 죽지 말자고. 이런 일로 세상을 등지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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