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에 실권 빼앗긴 2인자 "하늘이 보고 있다" 남기고…
리커창 전 중국 총리 사망
사인은 급성심장질환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세간에선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치하에서 총리로 지낸 10년 세월의 마음 고생 탓 아니었겠나 하는 이야기가 탄식처럼 흘러나온다. 그런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지난해 10월 22일의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 폐막식 장면이다. 당시 리커창은 같은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파로 정치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이 시진핑 측근에 의해 이끌려 강제로 퇴장하는 모습을 아무 말도 못하고 감내해야 했다. 어디 그 뿐인가. 아래로는 자신의 후계자로 촉망받던 후춘화(胡春華)가 정치국 위원에서 중앙위원으로 강등되는 상황 역시 막지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역대 최약체’ 총리란 말도 나왔다.
리커창은 총리 10년 재임 기간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 대표적인 게 경제 총수로의 실권을 시진핑에게 빼앗긴 것이다. 중국은 1998년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주석이 중앙재경영도소조의 조장 자리를 주룽지 총리에게 넘긴 이후 경제는 총리가 맡았다. 그러나 시진핑은 2013년 말 중국을 찾은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자신이 상대하기 시작하면서 리커창 무력화에 나섰다. 이후 중국 정가에서 나온 말이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의 다툼’이다. 시진핑의 당 중앙이 중난하이(中南海) 남쪽에 자리한 데 반해 리커창이 수장인 국무원은 북쪽에 위치한 데서 나온 말이다. 이 싸움은 지난 10년 내내 이어졌고 결과는 리커창의 패배였다.
리커창과 시진핑이 닮은 점도 있다. 두 사람 다 해외 유학을 갈 수 있었는데 국내에 남는 길을 선택했다. 시진핑은 첫 번째 부인 커링링(柯玲玲)이 아버지 커화(柯華)가 영국 주재 대사로 있는 기회를 이용해 유학을 떠나자고 졸랐지만 이를 거절했고 결국 이혼하는 계기가 됐다. 리커창은 영어 토플시험에서 630점을 받아 미 하버드대 법학과에 유학을 갈 수 있는 수준이었고 실제 유학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재능을 간파한 베이징대 당위원회 마스장(馬石江) 부서기의 권유로 학교에 남아 공청단 일을 맡게 된다.
이후 리커창은 82년 공청단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히며 당시 공청단 상무서기인 후진타오와 인연을 맺는다. 당시 두 사람은 “커창” “진타오”라고 서로 이름을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후진타오의 성장과 함께 리커창 역시 핵심 간부로 발전한다.
리커창은 93년 공청단 1인자(중앙서기처 제1서기)가 된 이후 98년 허난(河南)성 성장 대리가 된다. 중국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선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성에서 1인자 자리를 맡아야 한다는 잠(潛)규칙을 리커창도 따랐다. 99년 농업 위주의 허난성 성장이 됐다가 2004년부터는 공업이 중심인 랴오닝(遼寧)성을 맡는다. 명석하고 꼼꼼한 리커창은 중국 GDP 통계가 부풀려진 게 많다며 새로운 지표를 고안해 냈다. 전력소비와 철도운송, 은행대출 등 위조가 어려운 세 가지 숫자로 중국 경제 상황을 파악하는 ‘커창 지수(克强指數)’가 그것이다.
리커창은 후진타오 집권 2기인 2007년 9명의 정치국 상무위원 중 서열 7위로 최고 지도부에 입성했다. 6위 시진핑의 바로 다음이었다. 2012년 11월 당 대회에서 시진핑이 1위, 리커창이 2위에 오르자 사람들은 시-리(習李) 체제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오산이었다. 1인 권력 구축에 나선 시진핑이 자신을 권좌로 이끌어준 장쩌민의 상하이방을 내친 건 물론 리커창의 공청단파를 철저하게 부순 것이다.
리커창은 2013년 3월 총리 1기를 시작하며 세계은행과 함께 중국경제발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리커창의 원대한 포부는 이내 시진핑에 의해 거부됐다. 리커창은 시장을 중시하는 등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추구하는 리코노믹스를 추진했다. 이 역시 국유기업 중심의 시진핑 경제학인 시코노믹스로 대체되고 말았다. 이후 리커창은 약세 총리로 전락했다. 리커창 책임 하의 국무원 기구가 시진핑 관할의 당 중앙에 흡수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졌다. 국무원 산하 행정학원이 중앙당교에 접수된 게 그런 예다.
그래도 리커창은 시진핑 정책에 맞서 나름 애를 썼다. 시진핑이 중국 전체가 가난에서 벗어났다고 외치자 리커창은 “중국엔 월수입 1000위안(약 18만5000원) 이하 서민이 아직도 6억 명이나 된다”고 털어놓았다. 코로나 19 사태가 터졌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우한(武漢)을 가장 먼저 찾은 것도 그였다. 그래서 중국에선 시진핑 치세에 대한 반감이 높아질 때마다 ‘시샤리상(習下李上)’이란 말이 나왔다. 리커창이 권력을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것이다. 그러나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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