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눈·귀·입으로 44년…판문점 도끼 만행 생생히 기록
1976년 입대한 김 공보관은 동두천 미 2사단 공보실에 배속된 뒤 사단 기관지 ‘인디언 헤드’ 기자로 군 생활을 보냈다. 근무를 시작한 직후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지자 일촉즉발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고 전국의 미군 기지를 돌며 혼혈아의 비참한 삶을 조명하는 기사를 써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제대 3개월을 앞두고 주한미군 정식 직원으로 근무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그는 이때만 해도 ‘사회에 복귀할 때 영어 실력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겠거니’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이후 1985년 주한미군 공보실로 자리를 옮기며 지금의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Q : 40년 넘는 기간에 판문점을 가장 많이 방문한 한국인으로 꼽힌다.
A : “주한미군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유엔군사령부 공보관을 겸직하다 보니 내외신 취재 지원 등을 위해 일주일에 두 차례 판문점을 찾은 적도 있었다. 내게 판문점의 첫인상은 ‘대결의 장소’였다.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정전회담이 열리면 서로 악수도 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80년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교류의 장소’가 됐고 90년대 남북 대화가 본격화되면서는 ‘화해의 장소’라는 성격이 더해졌다.”
이처럼 대결·교류·화해가 공존하던 판문점은 갈 때마다 새로웠다고 그는 회고했다. 남북관계가 좋을 땐 건너편 북한군 표정에서도 활기가 느껴졌다. 반면 경색됐을 땐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몰라 양쪽 모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90년대 초 북한 기자가 ‘너희들은 경제적으로 앞서 있고 강력한 미군도 주둔하고 있지만 우리는 방어할 게 없다’며 핵 개발의 정당성을 주장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이에 나는 ‘우리 군사 시스템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런 점에서 판문점은 역사를 읽는 공간이기도 했다.”
Q :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A : “오랜 기간 일할 수 있던 비결은 간단하다. ‘열정’을 품으면 된다. 열정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재미를 느껴야 하고, 재미를 느끼려면 많이 알아야 한다.”
퇴임 후 주한미군 밖에서도 한·미동맹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볼 생각이라는 그는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다”고 말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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