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박하사탕처럼 단단한 '오페라 왕자'의 강림

유주현 2023. 10. 28.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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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오페라 ‘투란도트’ 인기몰이
26일 저녁 세종문화회관을 찾은 관객들은 국내에선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귀호강을 했다. 푸치니의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 ‘투란도트’(29일까지) 무대에 선 오페라 스타들 때문이다. 칼라프 왕자 역의 테너 이용훈을 비롯해 투란도트 역의 소프라노 이윤정, 류 역의 소프라노 서선영까지, 주인공 3인방이 주고받는 월드클래스 고품격 가창은, 적어도 귀만큼은 유럽 오페라극장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울시오페라단의 이번 공연은 일찌감치 화제였다. 뉴욕 메트오페라, 영국 로열오페라 등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에서 맹활약하면서도 정작 국내 오페라 무대에는 한 번도 선 적 없었던 정상의 테너 이용훈의 국내 데뷔 무대인데다, 연극계 거장인 손진책 연출이 70대 중반의 나이에 처음 만든 오페라이기도 해서다. 예술의전당이 전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야심차게 들여온 로열오페라 프로덕션 ‘노르마’와 정확히 겹치는 스케줄로 맞불을 놓은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투란도트’ 푸치니 오페라 중 가장 대중적

칼라프 왕자로 나선 테너 이용훈. [사진 세종문화회관]
막이 열리자마자 뒷모습으로 등장하는 훤칠한 비주얼의 이용훈은 뒤태부터 남달랐다. 국내 데뷔라지만 세계무대에서 ‘투란도트’를 120회 이상 공연한 베테랑답게 작은 몸짓 하나도 칼라프 왕자 그 자체로 보였다. 밀크초콜릿처럼 부드럽고 달콤하면서도 박하사탕처럼 청량하고 단단한 소리는 (서정적이면서도 강력한 한방이 있는) ‘리리코 스핀토 테너’의 정석이었다.

사실 3000석 대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이 고대한 건 저 유명한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부르는 이용훈이었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 전날 전 세계에 방영된 ‘쓰리 테너 콘서트’에서 파바로티가 부른 이후 온 세상이 다 아는 노래가 됐고, 모든 테너들의 로망이 됐다. 월드클래스라 칭송받는 이용훈이 첫 국내 무대에서 ‘Nessun Dorma~’를 내뱉는 순간 모든 객석이 초긴장하고 숨을 죽인 이유다. 정작 이용훈은 달랐다. 긴장감 대신 진정성 있는 연기를 실어 떡 주무르듯 완급 조절을 하다 마지막에 너무도 안정적인 고품격 초고음을 터뜨리며 ‘Vincero, Vincero!’를 외치자 자동반사로 객석의 열광적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오페라 왕자’의 강림이라고 하면 지나친 흥분일까.

서울시오페라단 신작 '투란도트'는 세계 최정상 테너 이용훈을 비롯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이날 공연을 본 바리톤 유동직 단국대 교수는 “같은 b음이라도 힘겹게 내는 게 아니라 극적인 스핀토 드라마티코에 딱 맞는 소리를 가졌기에 ‘Vincero~’의 순간 더 파괴력 있고 상승감이 느껴졌다”면서 “이용훈은 세계 최고 테너인 요나스 카우프만과 같은 에이전시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클래스로, 노래는 물론 연기·외모 등 모든 것을 갖춘 ‘육각형’ 성악가다. 국내 데뷔 무대라 이용훈을 보러 온 관객이 대부분이니 엄청난 중압감이 있었을 텐데 슈퍼스타다운 실력을 보여줬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용훈은 공연 직후 “해외 일정으로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어 부족한 점도 많고 힘이 들었다. 그 어떤 외국 무대보다 긴장되고 떨렸지만 사랑하는 한국 팬들을 직접 만나니 너무 기쁘고 가슴 설레고 뿌듯했다”면서 “오페라와 같은 클래식 음악이 골든 에이지를 지나고 대중적인 인기가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한 게 아니라 오페라 가수가 내가 존재하는 사명이라 생각해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울시오페라단 신작 '투란도트'는 세계 최정상 테너 이용훈을 비롯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선교활동을 병행하느라 데뷔가 늦어졌지만, 2007년 칠레 산티아고 시립오페라단과 2010년 뉴욕 메트오페라에서 ‘돈 카를로’ 주역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이용훈은 세계 성악시장에서 무명기간 없이 주역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드문 경우다. 빼곡한 해외 일정 탓에 국내에선 오페라는커녕 단독 콘서트도 한 적 없었지만, 내년 8월 예술의전당 제작 오페라 ‘오텔로’로 예고됐던 국내 데뷔를 훌쩍 앞당기게 된 데는 지난해 부임한 박혜진 서울시오페라단장의 섭외력이 한몫 했다는 후문이다. 박 단장은 “‘투란도트’를 올리기로 했을 때 이용훈 말고는 안된다고 생각해 밤잠도 못자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내 정성에 탄복했다며 까다로운 에이전시의 조건을 가수 본인이 힘써서 해결해줘서 계약이 성사됐다”고 말했다.

잿빛 구조물 형상화한 무대도 인상적

서울시오페라단 신작 '투란도트'는 세계 최정상 테너 이용훈을 비롯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이태섭 디자이너의 무대도 고대 중국풍 화려한 세트가 아니었다. 거대한 잿빛 구조물과 무채색에 가까운 의상들로 죽음의 도시를 형상화했고, 피날레에 환희의 찬가를 부를 때 눈부신 조명과 순백의 의상들로 급반전되는 강한 대조도 인상적이었다.

손진책 연출이 결말을 바꾼 것도 화제였다. 원작은 남성혐오가 심한 얼음공주 투란도트와 그녀를 목숨 걸고 사랑하는 칼라프 왕자, 왕자를 짝사랑하는 노예 류의 삼각관계가 노예의 죽음을 희생양 삼아 공주와 왕자가 사랑을 이룬다는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투란도트와 류가 모두 죽음을 택하는 비극의 끝에 천국에서 두 여인이 손잡고 폐허의 도시가 낙원으로 거듭나는 환상과 같은 피날레로 바뀐 것.

손 연출은 “평소 투란도트의 해피엔딩이 어불성설이라 생각해왔다”면서 “투란도트는 원하지 않던 사랑을 하게 된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택하지만 하늘에서 류가 그녀를 구제해 주는 것으로 설정했다. 류의 지고지순한 사랑만이 죽음의 도시를 삶의 도시로 바꿀 수 있다는 뜻에서 류를 부각시켰다”고 설명했다.

서울시오페라단 신작 '투란도트'는 세계 최정상 테너 이용훈을 비롯한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사진 세종문화회관]
이런 재해석이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1926년 이탈리아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투란도트’는 푸치니가 결말을 완성하지 못하고 절친한 후배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한 작품이라 해외에서는 다양한 재해석이 존재해 왔다. 음악 자체를 바꾸기도 하고 연출만 바꾼 경우도 무수히 많다. ‘라보엠’의 미미, ‘나비부인’의 초초상, ‘토스카’의 토스카 등 푸치니의 여주인공들이 모두 비극적 죽음을 맞았기에 비극이 더 자연스럽다는 시각도 있다.

존재감이 미미했던 서울시오페라단이 초호화 캐스팅과 창작진으로 화제몰이를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종문화회관 산하단체인 서울시오페라단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근거지 삼아 해외 창작팀을 적극 초청하는 국립오페라단과 규모 면에서나 완성도 면에서나 견주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지금 정면대결 중인 예술의전당 제작오페라 ‘노르마’나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살로메’ ‘엘렉트라’ 등 화제작들도 모두 외국 프로덕션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다.

해외 거장을 초청하고 본고장 오페라가수를 내세운 무대들이 국내 관객에게 월드클래스의 첨단 트렌드를 소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꾸로 국내 프로덕션이 아직 의심스런 수준이라는 반증인 것 같아 아쉽곤 했다. ‘투란도트’는 순수한 한국 프로덕션으로도 객석을 만족시킬 만한 오페라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하는 무대였다. 통념을 깨는 과감한 도전에 나선 서울시오페라단의 스웨그가 박수칠만 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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