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박하사탕처럼 단단한 '오페라 왕자'의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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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오페라 ‘투란도트’ 인기몰이
26일 저녁 세종문화회관을 찾은 관객들은 국내에선 좀처럼 누리기 어려운 귀호강을 했다. 푸치니의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 ‘투란도트’(29일까지) 무대에 선 오페라 스타들 때문이다. 칼라프 왕자 역의 테너 이용훈을 비롯해 투란도트 역의 소프라노 이윤정, 류 역의 소프라노 서선영까지, 주인공 3인방이 주고받는 월드클래스 고품격 가창은, 적어도 귀만큼은 유럽 오페라극장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서울시오페라단의 이번 공연은 일찌감치 화제였다. 뉴욕 메트오페라, 영국 로열오페라 등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에서 맹활약하면서도 정작 국내 오페라 무대에는 한 번도 선 적 없었던 정상의 테너 이용훈의 국내 데뷔 무대인데다, 연극계 거장인 손진책 연출이 70대 중반의 나이에 처음 만든 오페라이기도 해서다. 예술의전당이 전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해 야심차게 들여온 로열오페라 프로덕션 ‘노르마’와 정확히 겹치는 스케줄로 맞불을 놓은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투란도트’ 푸치니 오페라 중 가장 대중적
사실 3000석 대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이 고대한 건 저 유명한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부르는 이용훈이었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전 전날 전 세계에 방영된 ‘쓰리 테너 콘서트’에서 파바로티가 부른 이후 온 세상이 다 아는 노래가 됐고, 모든 테너들의 로망이 됐다. 월드클래스라 칭송받는 이용훈이 첫 국내 무대에서 ‘Nessun Dorma~’를 내뱉는 순간 모든 객석이 초긴장하고 숨을 죽인 이유다. 정작 이용훈은 달랐다. 긴장감 대신 진정성 있는 연기를 실어 떡 주무르듯 완급 조절을 하다 마지막에 너무도 안정적인 고품격 초고음을 터뜨리며 ‘Vincero, Vincero!’를 외치자 자동반사로 객석의 열광적 환호가 터져 나왔다. ‘오페라 왕자’의 강림이라고 하면 지나친 흥분일까.
이용훈은 공연 직후 “해외 일정으로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되어 부족한 점도 많고 힘이 들었다. 그 어떤 외국 무대보다 긴장되고 떨렸지만 사랑하는 한국 팬들을 직접 만나니 너무 기쁘고 가슴 설레고 뿌듯했다”면서 “오페라와 같은 클래식 음악이 골든 에이지를 지나고 대중적인 인기가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한 게 아니라 오페라 가수가 내가 존재하는 사명이라 생각해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잿빛 구조물 형상화한 무대도 인상적
손진책 연출이 결말을 바꾼 것도 화제였다. 원작은 남성혐오가 심한 얼음공주 투란도트와 그녀를 목숨 걸고 사랑하는 칼라프 왕자, 왕자를 짝사랑하는 노예 류의 삼각관계가 노예의 죽음을 희생양 삼아 공주와 왕자가 사랑을 이룬다는 해피엔딩이다. 그런데 투란도트와 류가 모두 죽음을 택하는 비극의 끝에 천국에서 두 여인이 손잡고 폐허의 도시가 낙원으로 거듭나는 환상과 같은 피날레로 바뀐 것.
손 연출은 “평소 투란도트의 해피엔딩이 어불성설이라 생각해왔다”면서 “투란도트는 원하지 않던 사랑을 하게 된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택하지만 하늘에서 류가 그녀를 구제해 주는 것으로 설정했다. 류의 지고지순한 사랑만이 죽음의 도시를 삶의 도시로 바꿀 수 있다는 뜻에서 류를 부각시켰다”고 설명했다.
존재감이 미미했던 서울시오페라단이 초호화 캐스팅과 창작진으로 화제몰이를 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세종문화회관 산하단체인 서울시오페라단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을 근거지 삼아 해외 창작팀을 적극 초청하는 국립오페라단과 규모 면에서나 완성도 면에서나 견주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지금 정면대결 중인 예술의전당 제작오페라 ‘노르마’나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살로메’ ‘엘렉트라’ 등 화제작들도 모두 외국 프로덕션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다.
해외 거장을 초청하고 본고장 오페라가수를 내세운 무대들이 국내 관객에게 월드클래스의 첨단 트렌드를 소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꾸로 국내 프로덕션이 아직 의심스런 수준이라는 반증인 것 같아 아쉽곤 했다. ‘투란도트’는 순수한 한국 프로덕션으로도 객석을 만족시킬 만한 오페라를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하는 무대였다. 통념을 깨는 과감한 도전에 나선 서울시오페라단의 스웨그가 박수칠만 했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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