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물건 사이 음산한 해골… 현대미술과 디자인으로 이어지는 메멘토 모리와 바니타스 전통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해골 그림과 ‘메멘토 모리’
“실제 저런 볼펜이 있기도 하지만 바니타스 회화의 영향을 받기도 했어요.” 이 그림 ‘Full of Love’를 그린 홍경택 작가의 말이다. 그는 28일까지 에이든 청담 호텔에서 9년 만의 서울 개인전을 열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화풍인 현란한 색채의 기하학적인 구상화로 10년 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당시 한국 현대미술 최고가를 기록한 바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초기부터 간략하게 돌아볼 수 있는 미니 회고전이다.
“종교가 가톨릭이다 보니 ‘메멘토 모리’ 형상에 익숙합니다.” 홍 작가는 설명했다. 우리가 백 살을 아등바등 산다고 해도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짧고 덧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벼운 일회성을 상징하는 것들, 플라스틱 볼펜부터 캔과 종이컵 같은 것을 많이 그렸어요.”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부패 대비시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 즉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권력자든 영웅이든 인간이면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상기시키는 전통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중세 말기부터였다. 당시에 흑사병(Black Death)이라고도 하는 페스트가 유럽 전역을 휩쓸며 인구 사분의 일의 목숨을 거둬간 충격의 여파였다.
중세 말기에 나타난 ‘메멘토 모리’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프랑스어로 ‘당스 마카브르(Danse Macabre),’ 독일어로 ‘토텐탄츠(Totentanz)’라고 하는 ‘죽음의 춤’이다. 썩은 해골로 의인화된 죽음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흥겹게 춤을 추면서, 왕관을 쓴 왕과 왕비부터 돈주머니를 든 상인, 그리고 농노와 아낙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씩 끌고 간다.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죽음 앞에서는 부귀영화도 부질없다는 메시지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물 중에 그냥 나온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정교하게 묘사된 화려한 왕관과 홀, 그 뒤의 주교관 등은 최고의 권력을 상징한다. 번쩍이는 은촛대와 회중시계는 부를 나타낸다.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죽음의 도래를 상징하기도 한다. 촛대의 촛불은 이미 꺼졌고 시계의 바늘은 자정에 가까워졌으니까 말이다.
그림 왼쪽, 아름답게 흐드러진 꽃다발이 시들어가고 있는 것도 인간의 젊음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꽃다발 중에는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광풍과 거품 붕괴를 가져온 줄무늬 튤립도 포함되어 있다. 꽃병이 유리로 되어 있는 것, 곧 꺼질 듯한 비눗방울이 공중에 떠돌고 있는 것도 모두 인간 삶의 연약함과 덧없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 가운데에 필연적인 죽음을 상징하는 음산한 해골바가지가 도사리고 있다. 그 밑에 책이 깔려 있는 것은 학문적 성취와 교양조차 죽음 앞에 헛된 것이라는 의미다.
이 그림에는 다른 글귀가 새겨져 있지만 대개 이 장르의 그림들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바니타스 바니타툼 옴니아 바니타스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 즉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지만 이 그림이 허무와 절망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해골이 쓰고 있는 밀 이삭으로 되어 있는 면류관은 성체성사를 의미하며 종교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상징하는 호랑 가시나무는 구원의 약속을 나타낸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그림을 포함한 바니타스 정물화들은 모순적인 데가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의 주요 컬렉터는 네덜란드와 플랑드르가 유럽 상공업과 국제무역의 중심지로서 황금시대를 구가할 때 성공한 상인들, 즉 신흥 부자들이었다. 그러니 그림 속 ‘럭셔리’ 물건들은 주문자들의 사치스러운 취향·교양과 관련이 있다. 게다가 반짝이는 금속과 유리 광택의 정밀한 묘사는 보는 사람들에게 감각적 즐거움을 선사하고 소유욕을 불러 일으킨다. 그런데 다음 순간에는 이 모든 것들이 허무하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부를 과시하고 더 쌓고 싶은 욕망과, 세속적인 가치보다 영원한 내세를 생각해야 한다는 종교적 교훈 사이에서 갈등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일종의 타협안으로 만들어낸 것이 바니타스 정물화일지도 모를 일이다.
죽음 터부시하는 한국선 부정적 이미지
게다가 이 그림을 소장한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 미술관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는 컬렉터의 역설 뿐만 아니라 화가의 역설도 있다. “안드리센의 기교적인 정물화는 바니타스 개념의 핵심인 역설을 구현한다. 그는 세속적 쾌락, 열정, 야망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사물을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예술적 기교에 감탄하도록 관람자를 유혹한다. 은색 촛대에 비친 두 개의 자화상은 이 역설을 잘 보여준다. 안드리센은 바니타스에 아이러니컬한 반전을 가미하여 물감으로 자신을 불멸화시키고 시간과 죽음을 이겨내는 작은 방식으로 승리한다.”
바니타스 정물화를 통해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부패를 대비시킨 옛 예술가들처럼, 맥퀸은 자신의 패션쇼를 연극적으로 연출했고 자신이 디자인한 의상을 통해서 아름다움과 부패와 죽음의 공존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나가곤 했다. 이는 젊음과 아름다움, 일시적인 트렌드에만 초점을 맞추는 패션산업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기도 했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듯, 맥퀸의 패션쇼도 그랬다.
서구에서 죽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전통은 절망적인 허무주의와는 다르다. 안드리스의 그림처럼 “내세를 생각하고 바르게 살자”는 종교적 의미를 가지기도 하고, 또한 알렉산더 맥퀸의 패션쇼처럼 ‘지금 우리가 무작정 집착하는 것들이 그럴 만한 것들인지 돌아보자’의 의미도 있으며, “지금 살아있는 순간을 최선을 다해 충실하게 살자”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메시지로 이어지기도 해왔다.
하지만 바니타스는 죽음에 대한 터부가 강한 한국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미지다. 십 여년 전 유명 디자이너의 장례식에 톱클래스 배우가 검은 옷에 알렉산더 맥퀸 해골 스카프를 두르고 갔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물론 장례식에는 일절 눈에 띄는 복장을 하지 않는 게 예의라고 볼 수 있겠지만, 메멘토 모리 전통을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복장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한편 홍경택 작가는 “해골 들어간 그림은 외국 컬렉터에게나 팔리지 한국 컬렉터에게는 결코 팔리지 않아요”라고 웃으며 말한 바 있다. 서구와 한국의 가장 큰 문화 차이 중 하나는 일상에서 죽음의 상징을 받아들이는 온도차인 것 같다.
문소영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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