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가을날 강아지와 할머니의 밀당

2023. 10. 28. 00: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을걷이, 경기 양주, 1980년 ⓒ김녕만
긴긴 여름 뜨거운 햇볕에 야물게 잘 여문 콩을 가을볕에 널어놓았다. 곡식 가운데 콩이 제일 더디 말라서 예전부터 농가에서는 콩을 갈무리하면 가을걷이를 다 끝마쳤다고 했다. 여름이 끝날 무렵 콩대를 꺾어 단을 만들어 세우고 햇볕과 바람에 여러 날 말린 후 콩을 털었다. 그리고 키로 까불어 검부러기를 제거하고 멍석에 널어 햇볕을 골고루 받도록 되작거렸다. 콩은 손이 많이 가는 대신 콩깍지와 콩대, 콩잎까지 버릴 것이 없어 귀하게 여겼다. 농가의 마당은 일터이고 집안 대소사를 치르는 행사장이고 이웃들과 정을 나누는 공간이었다. 어른들은 굳이 방을 두고도 마당에 평상이나 멍석을 깔고 술과 음식을 나누며 담소했고 아이들은 그곳 한구석에 엎드려 숙제를 했다. 때로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혼례식을 올리거나 초상을 치르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온 마을 사람이 마당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둥글거나 네모지거나 어떤 모양이든 쌀 수 있는 보자기처럼 마당은 그때그때 쓰임에 따라 얼마든지 변신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었다.

볕 좋은 가을날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고추든 깨든 콩이든 곡식을 말리곤 했다. 마침 한 농가에 들어섰을 때, 강아지가 할머니의 벗어놓은 고무신을 물고 내빼는 순간을 목격했다. 무관심하게 일만 하는 할머니에게 심술이 났나 보다. 할머니는 그제야 ‘복슬아~’ 부르며 구슬려 보지만 쉽게 돌아서지 않을 태세다. 온갖 곡식을 다 잘 말리는 할머니도 복슬강아지의 장난기를 말리긴 쉽지 않은 듯, 그러나 서두르지 않는다. 제풀에 지치면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강아지가 물고 있는 흰 고무신이 그동안 고되고 바빴던 발걸음을 말해주는 듯 시커멓게 흙물이 들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논으로 밭으로 고무신이 닳도록 종종걸음을 쳤으리라. 곧 가을걷이가 끝나고 시꺼메진 고무신을 뽀얗게 닦아 댓돌 위에 사뿐히 올려놓으면 비로소 한 해 농사도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다.

김녕만 사진가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