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맞서 피 끓는 투쟁, 종로는 조선 청춘의 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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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조선 사회운동 본거지
1929년 한 기자는 시골에서 친구가 서울에 온다면 꼭 구경시켜야 할 곳을 소개했다. 종합지 『별건곤』 23호 ‘경성 특집호’에 실린 ‘2일 동안에 서울 구경 골고루 하는 법, 시골 친구 안내할 노순(路順)’(『별건곤』 1929.9)에 ‘견지동 80번지’가 있다. 경성역에서부터 남대문~광화문을 지나 인사동 학생6거리를 거쳐 종로2가 쪽으로 내려오다 보성고보(지금의 조계사) 맞은편이다.
(견지동 80번지-인용자) 2층 위에 조선소년총연맹 한 칸. 그다음 간판 많은 2층이 서울청년회, 청년총동맹-무엇무엇하는 사회운동 선상에서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러 단체가 간판을 한 데 붙이고 저렇게 한 방에 있다.
이렇게 서술한 곳은 서울청년회, 조선청년총동맹, 조선소년총동맹, 청년회연합회, 경성청년연합회, 토요회, 전진회, 적박단, 신생활사, 카프(KAPF) 등이 입주해 있던, 조선 “사회운동 선상에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들의 ‘소굴’이자 아지트였다.
한반도 지도 걸개 그림 걸고 창당대회
1924년 4월 21일에는 서울청년회·청년회연합회와 화요회·북풍회계의 신흥청년동맹까지 망라한 청년단체의 전국적 통일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이 전국 223개 단체 대표와 700여 명의 방청객이 지켜보는 가운데 출범했다. 대회가 끝난 후에 “노동가를 부르며 시가지 행진을 하다 종로경찰서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10여 명의 청년이 검속”(『조선일보』 1924.4.22.)되고, 이에 수백 명의 군중들이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날 밤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이 각 여관을 돌며 24명을 추가로 검속했다. 조선청년총동맹회는 견지동 80번지의 조선청년연합회 사무소를 인계하고, 조선노동총동맹도 견지동 88번지에 사무소를 차렸다. 조직과 단체들은 종로로 결집했다. 종로는 민족·사회운동의 심장이 되어 들끓었다.
단체들은 종로 일대에서 지속적으로 군중집회를 개최하고, 강연 및 가두행진, 선전삐라 살포 등을 통한 대중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사상 조직 운동의 축적과 “이천만 대중의 열렬한 요구”(『동아일보』 1928.2.15)에 의해 좌우합작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 신간회(新幹會, 1927~1931)가 종로 관수동 143번지에서 준비되고 1927년 2월 15일 종로 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신간회는 종로에 본부(종로2가 45)와 경성지회(청진동 126번지)를 설치했다. 이러한 민족사회운동과 투쟁은 일제 식민당국과 첨예하게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운 사랑하는 동무야-
나는 지금 이 봄의 저녁이 모자 위로 가만히 내려앉을 때
너와 내가 젊은 기운이 타오른 투쟁에로 발길을 날리던
종로 이 길 이 거리를 걸어가며 간 네가 주는 눈물을 먹고 있다
(중략)
지금도 나는 이 길 거리를 걸어간다 네 발자국 내 발자국이 어우러져서 투쟁에 빛나던 그 길을 걸어가던
이 도시 이 길 거리 이 봄을 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 봐라 지금 내 옆에는 네가 없구나 네가 없구나
-임화, ‘봄이 오는구나-사랑하는 동무야’(1929) 부분
투쟁·구속·죽음 함께 기억되는 장소
종로 거리는 “젊은 기운이 타오른 투쟁”, “투쟁에 빛나던 그 길, 거리”이면서 동시에, 투쟁의 과정에서 검속과 구속과 죽음이 함께 기록되어 기억되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조선의 민족·사회·사상운동의 성장과 진출에 따라 일본 제국의 통치 전략과 탄압도 정교해지고 가혹해졌다. 1925년 치안유지법의 공포와 1931년 만주사변 등으로 일본 제국은 점점 파시즘화하고 저항운동에는 가차 없는 탄압과 구속, 회유, 포섭 전략을 구사했다. 1931년 신간회는 해산되었고, 그해 8월 임화도 종로경찰서 고등계에 피검되어 옥살이를 했다. 임화가 서기장으로 있던 카프는 두 차례에 걸친 검거와 탄압에 직면했다. 1934년 문화예술계 동지 100여 명이 구금되었고 임화는 결국 1935년 5월 22일 경기도경찰부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했다. 종로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던 많은 조직과 단체들은 잡히거나 지하화하거나 해산됐다. 종로의 청년들은 흩어졌다.
낯선 건물들이 보신각을 저 위에서 굽어본다.
옛날의 점잖은 간판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그다지도 몹시 바람은 거리를 씻어 갔는가?
붉고 푸른 ‘네온’이 지렁이처럼,
(중략)
번화로운 거리여! 내 고향의 종로여!
웬일인가? 너는 죽었는가, 모르는 사람에게 팔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다 잊었는가?
나를! 일찍이 뛰는 가슴으로 너를 노래하던 사내를,
그리고 네 가슴이 미어지도록 이 길을 흘러간 청년들의 거센 물결을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조선중앙일보』, 1935.7.27.) 부분
가슴 벅찬 이상과 열정으로 모여들던 청년들의 ‘거센 물결’, 함성이 사라지고, “누구 하나 네(종로-인용자) 위에서 청년을 빼앗긴 원한에 울지도 않”았다. 대신 종로는 “붉고 푸른 네온사인”과 신식 건물(화신백화점 등)들로 “번화로운 거리”가 되어 갔다. 시적 주체는 ‘다시 네거리에서’ 비통하게 종로에게 묻는다. ‘가슴 뜨겁게 이 거리를 장악했던’ 청년들은 다 어디 갔는가? 소비와 향락 혹은 전향으로 “팔렸는가”, “다 잊었는가”, “죽었는가”라고.
종로 네거리의 침탈, 그리고 현해탄
1935년 7월 4일 종로에 가로등이 점화되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35.7.6.)는 “경성의 심장이요 조선인 상점가의 중심이 되어 있는 종로통 일대는 수일 전부터 가로등이 서게 되어 명랑한 밤거리를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원컨대 거리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조선중앙일보』, 1935.7.27.) 부분
종로를 침탈당한 청년들은 흩어져서 지하로 숨어 들어가 활동을 이어갔다. 시인 임화는 종로의 연장으로서 새로운 청년의 영토를 구축했다. “청년들의 거센 물결”이 새롭게 굽이치는 곳, 현해탄이었다. “청년들의 거센 물결”(‘다시 네거리에서’ 부분)이 흘러가고 없는 종로를 대신하여 그는 ‘현해탄’을 청년이 새롭게 태어날 장소로 찾아낸다.
현해탄은 제국이나 국가로 환원할 수 없는 ‘공해(公海)’로서 새로운 아지트였다.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 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청년의 가슴은 바다보다 더 설래었다.
-임화, ‘해협의 로맨티시즘’ 부분
시집 『현해탄』 표지는 무겁고 두터운 구름, 휘몰아치는 폭풍, 격동하는 파도로 심란하다. 파도가 높을수록 청년의 이름은 더욱 빛났다. 그리고 현해탄이라는 공해에서 일국적 차원이 아닌 국제주의적 연장(延長)을 상상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정우택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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