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이상한 애’ 이야기

2023. 10. 27.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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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손 내밀지 않아도 웃던 아이
약자·차별·가난… 현실성 있게 그려

샤오훙, ‘손’(‘가족이 아닌 사람’에 수록, 이현정 옮김, 문학과지성사)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는 날은 평소보다 멀리 걷곤 하는데 얼마 전에는 거의 사십여 년 전에 다녔던 초등학교 앞까지 가게 되었다. 학교는 뒷산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로 둘러싸였고 교문은 닫혀 있었다. 김이라는 남자애가 떠올랐다. 사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늘 우리 반의 일등이었고 모두 다 가난하고 없는 살림이었을 텐데 특히 그래 보였던 친구. 머리도 입도 유난히 큰 그 애는 무슨 일에든 환하게 웃어서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여겼고, 매일 같은 반찬 한 가지만 싸 오는 것에는 짜증이 났었다. 이유를 모르지 않는데도 그 애 때문에 일등을 놓치던 나는 한번은 쏘아붙이고 말았다. 너는 왜 맨날 김치만 싸 오는 거니. 김은 머리를 긁적이며 소리 없이 크게 웃었다. 종종 김이 떠오를 때가 있다. 가난한 우리보다 더 가난했던, 공부 잘하고 성실했던 김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직도 그렇게 환하게 웃는지.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미안했다고. 늘 미안하게 생각해 왔다고.
조경란 소설가
탕웨이가 주연한 영화 ‘황금시대’ 여주인공은 가부장적인 집을 뛰쳐나와 격변의 1930년대 상하이, 하얼빈, 홍콩 등지를 떠돌며 포기하지 않고 글 쓰는 삶을 이어가려고 했던, 루쉰의 표현에 의하면 천재 작가였던 샤오훙이었다. 그러한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샤오훙의 소설은 계급관계에서 밀려난 사람들, 약자들, 가난과 차별당하는 주변인들, 그중에서도 여성의 이야기를 현실성 있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도 전형적이거나 교훈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인물들의 생생함 때문이 아닐까. 나에게는 단편소설 ‘손’의 왕야밍이 그 대표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시골 출신의,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왕야밍이 기숙 여학교에 왔다. ‘우리’는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봤다. “시퍼렇고, 시커멓고, 또 자주색 같기도 한”, 손끝에서부터 손목 위까지 그런 빛깔인 손 말이다. 그때부터 그녀를 ‘괴물’이라고 부른다. 아무도 그녀의 손에 관해서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영어 발음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모두에게 놀림거리가 됐으나 밝고 낙천적이며 침착한 왕야밍은 밤이면 “조금이라도 빛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책을 읽고 공부했다. 이 단편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인 나를 통해 서술돼 왕야밍의 속마음은 알기 힘들다. 그녀는 늘 흐흐 웃는 듯 보이지만 교장이 아침 체조 시간에 학교를 들여다보는 외국인들 눈을 신경 쓰느라 피부색이 눈에 띄는 왕야밍에게 나오지 말라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여름방학을 보낸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녀에게 냄새가 난다고, 이가 있다고, 손이 더 시커메졌다고 아무도 같이 방을 쓰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왕야밍은 기숙사 복도 벤치에서 자기 시작한다. 여기엔 너처럼 이상한 애가 없다, 사람이 더러우면 손도 더러운 거다, 라는 말을 피해서.

관리인마저 기숙사에서 일찍 학교로 걸어온 왕야밍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을 본 후에야 나는 그녀에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 추위에 학교 앞에서 문 열어주기를 기다리던, 어느새 어깨가 움츠러들고 등은 구부러지고 가슴팍은 쑥 들어간 왕야밍에게. 나는 내가 읽던 책을 왕야밍에게 빌려주었다. 암울한 현실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였다. 책이 좋았다고 하면서 왕야밍은 웃다가 눈물을 흘린다. 이제 처음 왕야밍은 자기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친구를 만나게 되어 아버지, 언니와 염색 공장에서 일하느라 방학 때면 손이 더 물이 든다는 사실을 말한다. 자신이 공부해야 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도.

왕야밍이 학교를 그만두는 날, 우리 중 아무도 잘 가라는 인사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그녀는 한 명 한 명을 향해 웃어주었다. 기숙사 복도 벤치에서 자던 그녀에게 아무도 손 내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그녀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다시 오겠다고. 나는 마지막까지 흐흐 웃으며 왕야밍이 떠난 자리를 본다. 마치 깨진 유리 조각으로 덮인 듯한 눈밭을, 눈이 따갑도록 내내.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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