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빼고 방향만 제시…국민연금 ‘맹탕 개혁안’
보험료율·소득대체율 수치 빠져
연령별 보험료율 차등 인상 제시
중장년층 가입자 반발 가능성 커
정부가 국민연금 개혁안을 발표하면서 개혁의 핵심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의 구체적인 조정안(수치)을 제시하지 않았다. 국회의 연금개혁 논의와 함께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지만 내년 총선을 의식한 정치적 판단이 깔렸다는 해석이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 초기부터 ‘3대 개혁’으로 연금개혁을 추진하겠다고 강조해왔음에도 정부가 ‘맹탕 개혁안’을 내놨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연금개혁을 실기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보건복지부는 2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한 계획안은 국민연금법에 따라 정부가 이달 말까지 국회에 제출하기 위해 마련됐다.
가장 큰 관심사였던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조정 수치는 운영계획에 담기지 않았다. 복지부는 “지속 가능성 제고를 위해 점진적인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 “소득대체율 상향 시 미래세대 부담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방향성 정도만 담았다. 보험료율 인상 땐 세대별 형평성을 고려해 연령그룹에 따라 인상 속도를 차등적으로 한다는 방향도 제시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전문가, 경영계와 노동계, 세대별 의견이 다양한 만큼 정부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기보다는 공론화 과정을 통해 국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다만 정부는 보험료율 인상 시 중장년보다 ‘더 내고 덜 받게 되는’ 청년층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세대별 보험료율 차등 인상’을 추진한다는 방향도 제시했다. 같은 5%포인트를 인상해도 장년층은 5년 동안에, 청년층은 15~20년 동안에 올려 ‘인상 속도’에 차이를 두겠다는 것이다. 이 또한 중장년 가입자들이 반발할 수 있어 논의가 필요한 내용이다.
정부는 수급개시 연령 및 의무가입 연령 등 제도 설계를 바꾸는 내용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복지부는 “수급개시 연령 추가 조정은 은퇴 후 소득 공백 확대를 감안해 고령자 계속고용 여건이 성숙된 이후 논의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또 “의무가입 연령을 높이는 것을 검토하되 수급개시 연령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낼 돈·받을 돈’ 제시 않고 공은 국회로…“총선 의식 빈수레”
국가 재정 투입 요구엔 “사각지대부터”…지급보장은 ‘명문화’
노령연금 감액제도 폐지…은퇴 후 재취업해도 노후소득 보장
찬반 거셀 ‘기초연금 40만원’ 시기·방법 미정…“무책임” 비판
공무원연금 등 직역연금처럼 국민연금에도 국가 재정을 투입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지만 정부는 “직접 재정 투입보다는 사각지대 지원에 국고 투입을 확충하겠다”고 했다. 실제 출산·군복무 크레딧, 저소득 지역가입자 보험료 지원 확대안이 담겼다.
은퇴 후 재취업하더라도 연금이 깎이지 않게 ‘노령연금 감액제도’ 폐지도 추진한다.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하고 고령자의 경제활동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지금은 국민연금 수급자가 된 후 최대 5년 동안 일정기준 초과 소득분에 대해선 일정 금액(급여의 최대 50%까지)을 뺀 급여를 받는다.
복지부는 또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 해소를 위해 국가의 지급보장을 법률에 명문화하겠다고 밝혔다. 재정여건에 따라 연금액을 깎는 ‘자동안정화장치’의 도입과 보험료 적립 방식의 전환(확정급여 방식→확정기여 방식)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한다고도 명시했다.
복지부는 기초연금은 현재 30만원 수준에서 40만원으로 인상하되 시기와 방법은 추후 논의하겠다고 했다. 보험료율부터 기초연금까지 모든 사안에서 ‘조정’을 하려면 찬반 논쟁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정부가 말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려면 오히려 구체적인 조정안이 제시돼야 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연금개혁의 시급성을 고려하면 정부가 구체안을 내놓지 않은 것은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올 3월 복지부가 발표한 재정계산에 따르면 국민연금 기금은 2055년 소진된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그동안 딱 2차례 손봤다. 보험료율(내는 보험료)은 1998년 이후 9%(직장가입자는 사측이 절반 부담)로 20여년째 동결돼 있다. 소득대체율(받는 급여)은 현재 42.5%이고 2028년 40%까지 내려간다. 저출생·고령화 심화에 따라 보험료 기반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노후소득 보장을 강화하려면 연금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노총·민주노총·참여연대 등 300여개 노동조합·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연금행동)은 이날 논평을 내고 정부 개혁안을 ‘맹탕 연금개혁안’이라고 비판했다.
연금행동은 “3대 개혁으로 연금개혁을 제시했음에도 윤석열 정부는 종합운영계획안에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지 않으며 연금개혁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며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촉구했다.
참여연대는 “공적보험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청사진을 내놓기는커녕 기금고갈론 중심으로 논의를 끌어가며 공포를 조장해놓고도 최소한 이를 해소할 만한 어떠한 방안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노후보장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 빈 수레 개혁안”이라고 꼬집었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개혁을 1년 미룰 때마다 앞으로 부담은 더 커진다”며 “지금도 시간이 흐르고 있으니 보험료율 인상과 나머지 소득대체율이나 구조개혁 논의를 구분해 할 수 있는 것부터 추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복지부 산하 전문가위원회인 재정계산위원회는 보험료율 인상(12%·15%·18%), 소득대체율 유지 또는 인상(45%·50%), 수급개시 연령 상향(68세), 기금수익률 제고 등의 방안을 조합해 24가지 시나리오를 최근 정부에 제출했다. 역시 지난해 11월 출범한 국회 연금특위 산하 민간자문위원회도 보험료율 인상(12%·15%), 소득대체율 유지 또는 인상(45%·50%)을 조합한 개혁안을 검토했다.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관련 보고서도 수차례 발행됐다. 복지부는 가입자 대상 면접도 진행했다. 구체적인 개혁안을 낼 수 있는 논의가 이뤄졌지만 전문가들이 만든 ‘보험료율 인상’ 시나리오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은 상황이다.
국회 연금특위는 총선 뒤인 내년 5월까지 활동을 연장하기로 한 상태다. 내년 총선 후 21대 국회 임기가 한 달여 남는다. 전문가들의 개혁안은 대부분 2025년부터 보험료율 인상을 전제로 했다. 더욱이 국회 연금특위는 지난 2월 “(보험료율·소득대체율 조정 등) 모수개혁은 정부 몫”이라며 ‘구조개혁’(기초연금·직역연금 등을 포함한 공적연금 통합개혁) 논의를 주로 해왔다. 국회가 ‘총선 국면’을 맞으면서 연금개혁 논의에 소극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김향미·민서영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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