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 인간을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로 부르기 시작할 때
분노와 증오의 불길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태워버릴 만큼 강력하다. 그 불길은 증오의 상대가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원료를 삼는다. 서로 죽이고 원한을 쌓아가던 팔레스타인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무력 충돌은 이제 국지적 충돌을 넘어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전 세계인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하마스의 대규모 기습 공격은 끔찍한 민간인 학살과 무차별적 인질 납치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스라엘은 피의 보복을 선언했고, 탱크가 가자지구 경계선을 뚫고 진격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대규모 지상전이 임박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번엔 다른 듯하다. 희생자 수뿐만이 아니라 아랍 국가들의 격앙된 반응과 복잡한 중동의 역학관계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촉즉발 그 자체다. 이 사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랍 국가들뿐만이 아니다. 전 세계 각국에서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시위를 벌이고 서로를 비난하며 진영 갈등을 벌이고 있다. 외국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들 간에도 무차별적 혐오범죄가 만연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양측 갈등을 역사적인 배경에 바탕을 둔 종교 분쟁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영토분쟁의 관점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분석으로도 그들의 증오와 분노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사태가 발발하자 세계의 경찰국임을 자임하는 미국의 지도자는 황급히 중동으로 날아갔다. 뭔가 새로운 해법이나 화해 방안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이스라엘 도착 8시간 만에 다시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스라엘 군대와 하마스 간의 교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가자지구로 향하는 유엔의 구호 물품 대부분이 국경지대에 발이 묶여 있고, 연료를 제외한 극히 적은 양의 생존 물품만이 공급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불과 며칠 사이에 발생한 사망자 수만 해도 23일 현재 양측 합산 6000명(이스라엘 측 사망자 수 1405명,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 수 5182명)을 넘어서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어린이와 여성에 피해가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보건기구는 가자지구 사망자 가운데 약 60%가 어린이와 여성이라고 밝혔다. 말 그대로 피로 피를 씻는 상황이다.
양측이 내놓는 공식 혹은 비공식 성명에는 혐오와 증오가 가득한 표현들이 난무하고 있다. 상대방을 “짐승” 혹은 “나치” 등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인종적 증오와 히스테리가 군인과 정치인, 민간인 할 것 없이 모두를 사로잡은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누구나 차별과 폭력을 혐오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외로 쉽게 동조되고 습관화되는 것이 차별과 폭력이다. 대량학살 같은 인류사의 비극은 미사일이나 총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 아닌 그 무언가로 부르기 시작할 때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당시 경제와 상권을 장악한 유대인에 대해 “거미가 천천히 민족의 땀구멍에서 피를 빨아먹기 시작하고 있었다”라며 혐오와 분노를 조장했다. 인간을 ‘거미’로 달리 호칭하는 순간, 인간에 대한 연민이나 인권의식은 사라지고, 폭력과 처분을 내적으로 정당화하는 심리가 작동한다. 증오 발언의 끝에는 홀로코스트가 기다리고 있다.
5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가자지구 ‘알아흘리 병원’ 폭격 참사에 대해, 현재 양측 모두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지하드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하마스는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요구하고 있다. 책임 소재를 떠넘기는 양측의 공방이 차라리 다행스럽기까지 하다.
아무리 극악한 상황이라도 전쟁범죄가 발생했다면 책임소재를 가리는 것이 마땅하다. 최소한의 진실 규명마저도 뒷전으로 미뤄두고 야만과 광기로 치닫는 것은 막아야 한다. 인간을 지워내고 짐승이나 그 무언가로 호명하기 시작할 때가 새로운 암흑의 시간으로 질주하는 시작점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바이다. 나치가 유대인 학살에 앞서 선전·선동을 했듯이 말이다. 누가 됐든 그 말이 발화되는 순간,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바로 비극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어느 누가 자식이 납치돼 살해당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양측 모두 피의 보복을 멈춰야 한다.” “보복은 어떤 형태로든 부당하고 잘못됐다.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2014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의 ‘50일 전쟁’ 당시, 희생당한 양측 소년들의 유가족이 남긴 말이다.
보일 스님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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